서양 철학의 근간을 이루는 아리스토텔레스는 노예제도를 지지했다. 시민 혹은 자유인이 시민으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려면 그들을 대신해 육체노동을 할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들 중에는 육체노동에 더 적합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다는 논리이다. 타고난 노예가 있다고 그는 믿었다.
선천적인 노예가 있고, 사회가 노예를 필요로 한다면 노예를 쓰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논리이다.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믿으면서도 노예제도를 인정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런 논리에 의존했을 것이다.
‘노예’ 대신 ‘여성’을 대입해도 논리는 같다. 남성들이 국가를 이끌고 사회를 이끄는 막중한 역할을 감당하려면 그들을 대신해 집안을 보살필 사람이 필요하고, 사람들 중에는 육아와 요리 등 집안일에 더 적합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여성이라는 것이다. 성인여성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이 ‘안사람’이었던 배경에는 이런 사고방식이 있었다. 여성은 집안에서, 남편의 그늘에서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믿어졌다.
문제는 ‘노예’든 ‘여성’이든 그들에 맡겨진 역할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자유의지로 택한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이나 제도에 의해 강요되었다는 것이 문제이다. 차별의 역사이다.
가부장 전통과 함께 수천년 여성을 둘러싸고 있던 벽들이 계속 무너지고 있다. 참정권에서부터 교육 취업 승진 등 차별의 벽들이 하나하나 무너지더니 이제는 여성들이 안 가는 데도 못 가는 데도 없다. 금녀의 영역이었던 각 전문분야마다 여성들이 속속 진출해 있고, 여성 대통령이나 총리는 여성이어서 오히려 더 환영 받는 분위기이다.
이번 주 미국에서는 의미 있는 벽 하나가 또 무너졌다. 미 국방부가 여군의 전투병과 배치를 허용했다. 리온 파네타 국방장관은 24일 전투지휘관을 비롯한 모든 전투병과 보직을 여군에게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벽은 ‘보호’이자 ‘차단’이다. 외부의 거친 환경으로부터 보호막 역할을 하는 한편 외부 세계가 펼쳐낼 모험과 가능성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여군을 포병, 보병, 기갑 특수작전 등 전투병과에서 제외한 것은 기본적으로 ‘보호’의 의미였을 것이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약한 여성에 대한 배려로 이해가 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여군은 전투병과 20여만 개 자리에서 제외되면서 불만이 컸다고 한다. 이들 보직은 보수가 상대적으로 높은 요직이자 군의 상층부로 올라가려면 필히 거쳐야 할 디딤돌이기 때문이다. 군 지휘부가 남성 일색의 전통을 이어온 데는 이런 배경도 한몫을 했다.
현재 미군 병력 중 여군은 거의 15% 정도. 공식적으로는 전투임무에 배치되지 않았지만 실제로는 전투병과 다름없는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 왔다고 한다. 그 결과 이라크와 아프간 전쟁에서 여군 130여명이 사망하고 800여명이 부상했다. 군 지위부에서 여군의 역할을 확대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긴 것은 여군들이 전장에서 보여준 임무수행 능력 덕분으로 해석된다.
전쟁터만큼이나 ‘금녀의 영역’이었던 곳으로 외과가 꼽힌다. 전쟁터처럼 피 튀기는 곳이어서 오랫동안 남성의 독무대였다. 한국에서는 최근 외과의 ‘금녀 벽’이 허물어지고 있다고 한다. 한번 수술실에 들어가면 꼬박 5~6시간씩 서서 수술해야 하는 체력적 부담 때문에 여성은 할 수 없는 일로 여겨졌었는데 이제는 외과의사 중 여성이 10% 정도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를 가능하게 한 것은 두 가지다. 여성 스스로가 보인 능력, 그리고 여성에 대한 인식 변화이다. 여의사에 대해 못 미더워하던 환자들이 이제는 여성의사들의 섬세함과 꼼꼼함을 오히려 더 좋아한다고 한다.
케임브리지 대학 경제학과의 장하준 교수는 저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맨 앞에 이런 글을 썼다.
“200년 전에 노예해방을 외치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100년 전에 여자에게 투표권을 달라고 하면 감옥에 집어넣었습니다. … 단기적으로 보면 불가능해 보여도 장기적으로 보면 사회는 계속 발전합니다.”
‘발전’은 사회 곳곳의 불공평한 벽과 경계를 허물어 가는 것, 그래서 인류가 인종과 성별을 넘어 평등에 이르는 것을 말할 것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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