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농 회고전
▶ 1월11일~23일 LA 한국문화원
가느다란 붓끝에서 나오는 그 엄청난 에너지, 유화처럼 덧칠하는 일 없는 찰나적 퍼포먼스, 그 퍼포먼스가 나타내는 백과 흑의 선명한 흔적, 춤추는 점과 선, 때로는 말뚝 같은 대단과 섬세함, 가만히 바라다보면 거기엔 음악이 있고 시가 있다. 거기엔 기쁨이 있고 슬픔이 있고 또 용기가 있고 애수가 있다.
<하농 김순욱>
현대서예의 선구자 고 하농 김순욱(1929~2012) 박사의 회고전이 1월11일부터 23일까지 LA 한국문화원(원장 김영산)에서 열린다.
지난해 5월 타계한 김순욱 박사는 현대서예란 장르를 개척하여 미주 한인사회뿐 아니라 미국과 한국, 아니 세계 화단에서 현대예술의 한 분야로 정착시킨 인물로, 서예가들 사이에서는 가장 존경받는 원로로 꼽힌다. 한국문화원이 한 개인의 작품전을 거의 열지 않는 관례를 깨고 회고전을 주최하는 이유도 그러한 공로를 높이 평가하고 기념하며 추모하기 위한 일이라 여겨진다.
전통서예에 현대미술 접목
세계 화단 우뚝… LA 활동도
붓의 힘찬 획마다 열정 가득
아끼던 전각작품도 함께 전시
신경외과 전문의였으나 자신을 의사로서보다 서예가로 먼저 소개하곤 했던 하농 선생은 근 50년 동안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서예와 전각에 몰두해온 진정한 장인이요 도인이었다.
그가 4권까지 발간한 자신의 현대서예 도록 ‘아트 오브 잉크’(Art of Ink)를 들여다보면 어떤 현대미술가도 흉내 낼 수 없는 작품들이 한 장 한 장 시선을 사로잡는다. 일회적인 붓의 움직임, 단번에 내려 그은 획 하나가 얼마나 힘 있고 극적이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는지, 거기에 서린 한 순간의 정신과 혼과 기에 도취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게 된다.
고 김순욱 박사는 1952년 서울 의대를 졸업하고 수도 의대(현 고려의대 전신) 교수와 적십자병원 신경외과 과장을 역임한 후 76년 가족과 함께 미국 북가주로 이주, 96년 은퇴할 때까지 20년 동안 샌프란시스코, LA, 뉴욕에서 재향군인병원의 신경외과 의사로 일했다.
64년 철농 이기우 선생을 사사하면서 서예와 전각을 시작, 한국서부터 활발하게 활동하며 서예에 남다른 열정을 보였던 그는 미국에 와서 서예 하는 사람을 찾지 못하자 ‘묵향회’를 조직하고 사람들을 모아 직접 가르쳐가면서 서예를 보급했다.
어떤 때는 의사라는 직업보다 서예에 더 열중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전통 서예에 푹 빠져 있던 하농 선생이 현대서예를 시작한 것은 미국의 현대미술을 접하면서부터였다. 그는 1989년 뉴욕으로 이주, 현지 VA 병원에서 7년간 근무했는데 그때 잭슨 폴락, 로버트 마더웰, 몬드리안 등의 추상미술에 새로운 눈을 뜨게 됐다고 아내 김옥환 여사는 전한다.
“맨해턴의 수많은 갤러리들을 돌아다니며 추상미술을 많이 보셨죠. 현대미술계의 변화를 보면서 서예도 현대화해야겠다고 느끼셨어요. 틀에 맞춰 예쁘게만 쓰는 옛날 붓글씨, 전통서예는 아무리 잘 써봐야 모방일 뿐 예술적 가치가 없다면서 현대서예를 시작하셨습니다”
평소 전통 서예도 자기 색깔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하농 선생은 서예가가 더 이상 ‘글씨쟁이’로만 남을 것이 아니라 다른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늘 공부하고 창작하며 새롭게 변모하는 동양의 ‘서’ 예술을 보여주자고 역설했으며, 소수의 중국인 현대서예가들을 찾아 교류하고 전시회도 함께 열면서 현대서예라는 분야를 개척해 나갔다.
그래서 만든 것이 유명한 ‘아트 오브 잉크 인 아메리카’(Art of Ink in America). 한·중·일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 등 범세계적 작가들이 모여 현대서예를 개발하고 계몽하며 전시활동을 열기도 하는 이 단체를 하농 선생은 창립 때부터 2009년 건강이 나빠질 때까지 20년간 회장을 맡아 이끌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 그리고 중국 한자를 모두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 그 밖에 없기도 했지만 온갖 궂은 일 잔 일 힘든 일을 도맡으면서 현대서예를 알리는 일을 사명처럼 해내는 사람은 김 박사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회장으로 있는 동안 ‘아트 오브 잉크’는 매년 미국 내 여러 뮤지엄에서 그룹전을 가졌으며 프랑스, 이탈리아, 대만, 싱가포르 등 해외에서도 전시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은퇴 후 LA로 돌아온 하농 선생은 본격적인 작품 활동과 제자 양성에 전력했다. 2009년 적혈구가 줄어드는 희귀 혈액병 진단을 받았으나 2011년 병석에 눕기 직전까지 왕성하게 작업했다고 김옥환 여사는 전한다.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상에서 작품을 가져오라고 하시더니 그 중 30점을 골라 한국으로 족자해오라고 보내시는 거에요. 그땐 참 이상하다. 이제 더 이상 전시할 일도 없을 텐데 왜 그러시나, 했는데 이렇게 유작전을 열게 됐네요. 미리 내다보고 준비하신 것 같습니다”
이번 회고전에는 전통서예와 현대서예 40여점이 전시되며 전각작품도 약 20점 소개된다. 50년 서예와 함께 전각도 해온 하농 선생은 “돌에 글자 새기는 조형예술”이라며 병원 책상서랍에 도구를 넣어놓고 환자 보는 틈틈이 돌을 팔 정도로 전각의 재미에 깊이 몰두했다고 한다.
“도장 돌에 대한 애착이 유난했어요. 아름답고 희귀한 돌을 보면 밤잠을 설치고, 여행 갈 때마다 돌을 사오느라 짐가방이 돌가방이 되기도 했지요. 돌 하나하나마다 이야기가 있고, 병석에서도 돌을 곁에 두고 바라보곤 하시며 가장 아까운 것이 돌이라 하셨는데 다 두고 가셨네요”라고 아쉬움을 전하는 김 여사는 그래도 “은퇴 후 하농 선생은 매일 아침 동녘 창에 들어오는 햇살을 바라보며 글씨 쓰고 돌을 파고 정원에서 분재를 하면서 행복하게 지내셨다”고 회상한다.
하농 선생은 10여회의 개인전과 셀 수 없이 많은 그룹전에 참여했고, 국제현대서예협회·국제전각협회·서예가협회·묵향회 회장을 지냈으며, 은퇴 후 가르친 제자들이 만든 ‘하농서회’는 지금도 제자들이 모여 활동하고 있다. 뉴저지의 뉴왁 뮤지엄, 패사디나의 퍼시픽 아시아 뮤지엄, 샌프란시스코의 아시안 뮤지엄이 하농 선생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유가족으로 1남2녀와 6명의 손자손녀가 있다.
신기한 것은 전시회 오프닝 날인 11일은 하농 선생이 별세 후 처음 맞는 양력 생일, 오프닝 리셉션이 열리는 12일(오후 12시)은 음력생일이라는 점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라는데, 제자들과 지인들, 사랑하는 가족에게 더욱 뜻 깊은 날이 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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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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