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던 한인 이민선조들이 태극기를 걸고 고종 황제의 생일 축하행사를 갖고 있다.
1903년 1월13일 겔릭호 102인 호놀룰루에 첫발
2년간 7천여명 이주… 조국독립 산실 역할
남다른 교육열·성공신화 주목받는 소수계로
2013년 1월13일은 한인들이 미국 땅에 발을 디딘 지 110주년이 되는 뜻 깊은 날이다. 가족으로 치면 증조부모, 조부모, 부모, 자식까지 4대를 이을 수 있는 긴 시간. 1903년 1월13일 오전 3시30분 하와이 호놀룰루 제2부두에 정박한 겔릭호에는 한인 이민선조 102명이 타고 있었다. 이후 110년이 흐른 지금, 연방 센서스 공식집계(2010년 기준)에 따르면 한인 인구는 142만3,784명을 기록 중이다. 한인 이민역사 110년 동안 인구가 1만3,959배로 늘어난 우리네 삶과 이야기를 돌아봤다.
■하와이엔 돈 나무가 있다
구한말인 1901년 한반도는 기근이 들고 백성은 굶주렸다. 의료 선교사 호레이스 알렌은 조정에 ‘미국 이민’을 권장했고 대한제국은 인력 송출을 위해 ‘수민원’을 설립했다. ‘백성이 외국에 나갈 수만 있다면 식량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은 고종 황제도 백성들의 미국행을 권장했다.
1902년 12월22일 감리교인 50명, 인천 제물포항 노동자 20명, 농부 등 전국에서 자원한 51명 등 총 121명이 오늘날 여권인 ‘집조’를 손에 쥐고 미국 상선 겔릭호에 올랐다. 선창가에 나온 존스 목사는 이들의 아메리칸 드림을 기도했다. 이중 일본에서 신체검사에 통과하지 못한 19명이 중도 탈락하고, 남은 102명은 추운 겨울바다를 건너 1903년 1월13일 마침내 하와이 호놀룰루에 입항했다. 이중 신체검사를 통과한 86명이 오아후섬 모쿠레아 사탕수수 농장에서 한인 이민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한인 이민 선조의 장밋빛 아메리칸 드림은 말 그대로 ‘꿈’이었다. 이들에게 닥친 것은 뙤약볕 아래에서 최저임금만 받으며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사를 짓는 고된 삶이었다. 그럼에도 일본과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이 박탈된 1905년까지 이민 선조 7,226명이 미국행을 택했다. 1910년부터 1925년까지 고공덕, 천연희, 유분조 등 ‘사진신부’ 950여명은 한국에서 남편 될 남자의 사진만 보고 미국행 배를 탔다.
■이민자들의 조국애
초기 이민 선조들은 현지 정착에 힘썼다. 한인들은 영어를 배우며 자식 교육에 힘썼고 돈을 모아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이중 2,000여명은 샌프란시스코 금문교를 통과해 미 본토행을 감행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삶이지만 이들은 ‘새로운 도전과 기회’를 과감히 선택했다.
1905년을 전후해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 리버사이드, 중가주 다뉴바·리들리, LA에도 첫 한인타운이 형성됐다. 장정들은 콜로라도 로키산맥 광산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후 이민선조들은 오렌지 농장 노동자였던 도산 안창호, 이승만, 박용만, 서재필 등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1905년 을사보호조약, 1910년 한일강제병합을 규탄하며 국권 회복운동에 나섰다.
나라를 잃은 이민선조들은 ‘대한인국민회·대한인 동지회·흥사단·여자애국단’을 결성해 조국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농장 노동자, 세탁소 종업원, 벨보이, 집사, 일용직 등 힘든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간 이들은 일제강점기 동안 약 300만 달러란 거금을 모금해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했다.
1945년 8월15일, 그토록 바라던 조국 해방 이후 이민선조 대부분은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숨을 거뒀다. 당시 미주 한인은 1만여명을 넘어섰고 70%가 하와이, 30%가 LA,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에 거주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격 이민 행렬
해방된 조국은 1950년 6월25일 동족상잔이란 비극을 미주 한인사회에 전한다. 낙심과 절망도 잠시 미주 한인들은 다시금 발 벗고 나서 구호물품을 한국에 전달한다. 1948년 런던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세미 리 박사는 김영옥 대령처럼 미군으로 참전했다. 특히 ‘김 형제상회’(KIM Brothers)로 한인 최초 백만장자가 된 애국지사 김형순ㆍ김호 선생, 송철, 이재수 선생은 독립운동 때부터 1960년대 한인사회 부흥기까지 정신적·물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50~60년대 한인 2세들은 부모들의 교육열에 부응하듯 사회 각계각층으로 진출한다. 이들은 한미시민기구, 한인기독청년회, 타이거 농구팀, 권투팀 등을 꾸려 한인 유대를 이어나갔다. 한국전쟁 국제결혼한 한인 부인, 입양아, 유학생들은 이미 정착한 한인 선배들과 새로운 한인사회를 만들기 시작했다.
1965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제안하고 존슨 대통령이 서명한 이민법은 가족 이민시대를 열어 미주 한인사회가 도약의 시기를 맞이한다. 이후 매년 2만여명의 가족이민 행렬이 LA와 뉴욕 등 주요 도시에 도착했다.
■LA 폭동과 오늘의 이민사회
1990년대 전국 주요도시 한인사회는 각 분야별 성장을 통해 모범적인 소수계 커뮤니티로 인정받았다.
하지만 1992년 LA 4.29폭동은 자영업으로 생계를 꾸리던 대다수 한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미주 한인 이민 100년사 중 가장 큰 불행으로 기억되는 4.29폭동. 미주 한인들은 피와 땀으로 일군 LA 한인타운이 불에 타는 모습을 TV로 지켜만 봐야 했다. 당시 약 2,374개의 한인업소가 전소됐지만 한인사회는 포기하지 않았다.
4.29 폭동은 큰 슬픔이었지만 미주 한인에겐 정체성을 깨닫게 해준 사건이기도 했다. 1.5세 2세들은 주류사회로 진출해 제 목소리를 냈으며, 전국 한인사회는 다민족·다문화를 존중하며 ‘공생’을 선택했다. LA한인사회도 재기에 나서 20년 후 한인타운을 LA 제2의 상권으로 키우는데 성공했다.
그 결과 2003년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은 한인사회의 잔치이자 한국의 잔치로 기록됐다.
1950년대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한국은 세계 10대 경제강국으로 성장했고 미주 한인사회도 전문화, 다양화, 대형화의 길을 걸어 미국 내 당당한 소수계로 자리매김했다. 2013년 현재 주요 도시 한인타운은 경제부흥과 함께 한국 문화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됐다.
2005년 12월 미국 연방의회는 매년 1월13일을 ‘미주 한인의 날’(Korean American Day)로 기념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미국사회가 ‘문화, 예술, 경제, 과학, 스포츠’ 등 사회 각 분야 발전에 기여한 한인들의 공로를 인정한 것이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로 미국 땅에 발을 디딘 후 110년, 현재 백악관에는 크리스토퍼 강 선임 법률고문, 유진 강 대통령 특별기획 코디네이터, 애나 김, 브라이언 정 국가 경제정책 보좌관 등 한인 10명이 버락 오바마 대통령과 일하고 있다. 2012년 11월6일 선거에서는 한인 14명이 연방, 주의회, 시장, 시의원, 교육위원 등 선출직 공무원에 당선됐다.
<김형재 기자>
<참고문헌> •미주한인이민 100년사 (한국일보 미주본사ㆍ미주 한인이민 100주년 기념사업회)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현실문화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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