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말리는 싸움이 끝나고 승부는 가려졌다. 국민은 앞으로 5년간 대한민국을 이끌어 갈 새로운 지도자를 선택했다. 승리의 열매는 언제나 달콤하다. 그러나 패배의 고통은 쓰리다. 특히 이번 대선처럼 보수와 진보가 총 결집해 벌였던 극렬한 싸움에서는 더욱 그렇다.
패자의 승복은 기본이다. 하지만 승복한다고 해서 상처와 고통이 저절로 치유되는 것은 아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벌이는 승부는 어김없이 깊은 상처를 남긴다. 패자의 아픔을 헤아리고 보듬어 주는 승자의 배려와 겸손 없이 이런 상흔은 쉽게 아물지 않는다. 이것은 분노가 되고 분노는 적대감을 상승시킨다. 대선 때마다 되풀이 돼 온 승자의 오만이 이번에도 반복된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올 한해 대한민국을 휩쓴 가장 두드러진 트렌드는 ‘힐링 열풍’이었다. 일상생활에서부터 문화계에 이르기까지 힐링은 가장 자주 입에 오르는 단어가 되고 현상이 됐다. 생존을 놓고 벌이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상처 입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말이다.
힐링을 갈구하는 마음속 깊숙이 똬리를 틀고 있는 감정은 불안과 불신이다. 대한민국은 지난 수년간 ‘불안 공화국’이 돼 왔다. 양극화와 흉악 범죄 같은 사회병리 속에서 불안은 증폭되고 이것은 유례없이 높은 자살률로 나타나고 있다. 또 계층 간, 지역 간 불신은 이제 이념 대립을 넘어 세대 간의 갈등으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이번 대선은 대한민국 구성원들 간에 불신의 골이 얼마나 깊은지 극명하게 드러내줬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책과 가르침 등을 통해 위안을 찾는다. 하지만 개인적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치유에 한계가 있다. 사회적인 제도와 시스템이 달라지고 변화하지 않는 한 근본적인 힐링은 어렵다. 이것을 이뤄낼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정치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승자는 이런 책임감을 무겁게 받아들이면서 이제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치유해 주는 ‘힐링의 정치’를 시작해야 한다. 자살자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는 사회를 만들고 온 나라를 적과 동지로 나눠 서로 싸우도록 해 온 ‘분열의 정치’를 끝내야 한다. 이런 썩은 정치의 책임소재를 따지며 논쟁을 벌이는 일 따위는 부질없다. 그만큼 지금 대한민국의 병세는 깊고 위중하다.
표현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대선후보들은 캠페인 내내 힐링과 통합을 외쳐왔다. 국민 앞에 내걸었던 약속에 조금의 진정성이라도 담겨 있다면 이를 즉각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승자독식 논리에 빠져 상대를 보듬어 주지 못한다면 힐링은 물 건너가게 된다. 패자를 포옹하고 포용하는 일이 힐링의 첫걸음이다.
지난달 개봉한 영화 ‘링컨’의 원작은 역사학자 도리스 굿윈이 쓴 ‘팀 오브 라이벌스’(Team of Rivals)이다.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링컨은 정치적 라이벌들을 거리낌 없이 중용해 국난을 극복했다. 그는 자신을 ‘긴 팔 원숭이’라고 놀리며 경멸했던 에드윈 스탠튼을 전쟁부 장관으로, 또 가장 강력한 맞수였던 윌리엄 시워드를 국무장관에 기용하는 등 능력만 있으면 정치적 친소를 떠나 국정을 맡겼다.
링컨의 포용은 힐링의 본보기일 뿐만 아니라 힐링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정치임을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링컨이 했다면 대한민국의 새로운 리더라고 못할 것이 없다.
링컨의 큰 정치를 힐링의 한 표현이라고 한다면 이런 힐링의 정치를 가능케 해 주는 리더의 기본적 자질은 공감이다. 대선 막바지 한 후보 찬조연설자로 나섰던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는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힘이 공감”이라며 “공감하는 일은 치유가 절박하게 요구되는 지금 이 시대 리더들에게 가장 필수적인 자질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치적 입장을 떠나 누구라도 수긍할 만한 지적이다.
당장은 패자를 보듬고 길게는 경청과 소통을 통해 국민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공감의 리더십이고 힐링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할 줄 모르는 리더는 치유자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더 큰 고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뼈저리게 체험했다.
대한민국을 두 쪽으로 갈라 온 대립과 적대의 시간을 끝내야 할 때가 왔다. ‘킬링의 정치’ ‘증오의 정치’를 종식시키고 그 위에 ‘힐링의 정치’ ‘관용의 정치’를 새롭게 세워나가야 한다. 승자는 앞으로 5년 동안 한시도 이런 시대적 요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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