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은 분배와 복지를 앞세우는 진보정당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예측에서 많이 빗겨나 있다. 경제적 하층민들이 부자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치세력에 표를 던지는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이다.
지난 4월 총선에서 서민경제 파탄 등 이명박 정부의 실정으로 야당 승리가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결과는 보수인 새누리당의 승리였다. 당시 계층별 투표성향을 분석한 것을 보면 스스로를 경제적 하층이라고 응답한 유권자들의 새누리당 지지가 다른 계층보다 더 높았다. 소위 ‘계급배반’ 투표가 두드러졌던 것이다.
큰 충격을 받은 진보는 전열과 대오를 정비해 12월 대선에 나섰다. 하지만 현 상황도 진보에 그리 우호적이 아니다. 살림살이가 갈수록 팍팍해지고 하층으로 전락하는 국민들이 늘어나는 데도 왜 진보는 민심을 확실히 장악하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일까. 이유는 두 가지이다. 하나는 보수 전략의 성공이고 다른 하나는 진보의 패착이다.
진보는 보수와의 프레임 전쟁에서 밀린다. 특히 보수가 언론권력을 장악하고 있을 경우 프레임 전쟁의 승패는 더욱 확연해진다. 보수의 가장 기본적인 전략은 경제적 하위계층에게 그들의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대상을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경제적 이해관계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만드는 것이다. 한국 뿐 아니라 미국 선거를 보더라도 경제적으로 낙후된 주들의 보수 지지가 두드러진다.
이 문제에 관한 가장 탁월한 분석으로 꼽히는 책은 정치평론가 토머스 프랭크가 지난 2004년 쓴 ‘캔사스에 무슨 일이 있는 것인가’이다. 프랭크는 자신의 고향이자 미국에서 가장 가난한 주 가운데 하나인 캔사스가 지난 수십 년 사이 어떻게 “가난한 노동자들이 자신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치명타를 날리는 정책들을 남발하는 후보들에게 압승을 안겨주며 박수를 보내는” 곳으로 변모해 왔는지 추적했다. 그리고는 노동자들의 분노를 경제가 아닌, 도덕과 종교적인 문제들에 집중시킨 공화당의 전략이 먹힌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많은 저소득층은 자신들의 곤고한 처지를 잊게 해 줄만한 상징이나 표상을 찾는다. 국가와 애국심을 앞세우는 보수정당은 이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해 준다. 특히 한국의 경우 곳곳에 깊이 뿌리 박혀 있는 ‘레드컴플렉스’는 저소득층의 진보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아주 유용한 기제가 돼 왔다.
몇 달 전 한국의 한 진보정당 내에서 ‘아메리카노 논쟁’이 붙었다. “한 잔에 몇 천 원씩 하는 고급 커피를 즐기는 사람들이 과연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겠는가”라는 내부 비판이 제기되면서 벌어진 사소한 논쟁이었다. 하지만 보수언론들은 이를 연일 크게 보도했다. 비싼 커피를 마시며 입으로만 진보의 가치를 외쳐대는 인사들을 뜻하는 부정적 용어인 ‘라떼 리버럴’로 채색하기 위한 의도였다. 그리고 이런 의도는 잘 먹혀들었다.
그러나 진보가 처해 있는 상황의 책임을 전부 보수에게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진보 자신에게 있기 때문이다. 진보가 빠져 있는 가장 큰 착각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들려주고 계몽만 하면 자신들을 지지해 줄 것이라는 믿음이다.
이런 착각은 순진하고 동시에 오만하다. 가르치려 드는 어법은 동의를 얻어내기보다 반감을 초래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그런데도 한국의 진보는 지나치게 계몽적인, 그리고 가끔은 선동적인 어법을 구사함으로써 자신들이 대변하려는 계층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고 있다.
진보가 보수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또 있다. 스킨십이 바로 그것이다. 제주 강정 해군기지 찬성집회에 동원된 한 노인이 “보수는 우리에게 밥도 사주고 용돈도 쥐어 주곤 하는데 진보는 도대체 해 준 것이 무엇인가”라고 비난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노인의 말을 생각 없는 푸념으로만 치부해서는 진보의 미래가 없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당장 자신에게 건네지는 연탄 한 장인 경우가 더 많다. 일부 DJ계 구정치인들이 보수대연합에 합류한 것도 따지고 보면 민주통합당이라는 공간에서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어져 버렸다는 소외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정치는 누구의 이상론이 더 훌륭한가를 놓고 벌이는 경합의 장이 아니다. 정치에서는 결국 국민의 마음을 어떻게 얻느냐가 관건이다. 민심을 얻을 수 있는 올바른 전략을 세우고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만한 자신들의 언어를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진보의 고전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이번 대선 결과와 관계없이 말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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