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동안 기다려온 전시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기대와 흥분은 지난주 미디어 프리뷰에서 실제로 보고난 후에도 오래도록 가시지 않는다. 11일 LA카운티 뮤지엄(LACMA)에서 개막된‘육체와 그림자: 카라바조와 그의 유산’(Bodies and Shadows: Caravaggio and His Legacy)은 라크마와 웨즈워스 아테네움 뮤지엄(코네티컷주), 프랑스의 파브르 뮤지엄과 오귀스땡 뮤지엄 등 4개 미술관이 국제미술관 공조협약의 지원으로 성사된 특별기획전이다.
다빈치에 버금가는 거장
극사실주의 추구‘빛의 화가’
살인자 오명… 20세기 재평가
파격적인 인물묘사로 물의
그의 영향 받은 작가 작품과
라크마서 2월10일까지 소개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1571~1610)는 한국인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이탈리아에서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에 버금가는 인물로 평가되는 인물로서, 그의 작품 소장 여부가 세계 최고 수준의 미술관이냐 아니냐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특별한 화가다. 르네상스 후기에서 바로크를 잇는 시대의 천재화가로 명성을 떨쳤던 그는 사망 후 잊혔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재발견돼 거장으로 재평가됐다. 특히 ‘살인자’라는 오명을 가진, 불가사의하고 매혹적이며 위험했던 그의 생애는 카라바조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데 한몫 하고 있다.
카라바조는 극사실주의를 추구했던 빛의 화가다. 흔히들 바로크 미술의 거장인 렘브란트나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같은 사람을 빛의 화가로 알고 있지만 이들은 카라바조를 모방한 후대 화가들이며 자연의 빛이 아닌 인위적인 빛으로 명암을 극명하게 다뤄 극적 효과를 보여준 그림은 카라바조가 처음 시도한 혁신적 기법이다. 그는 램프를 얼굴에 비춘 뒤 인간의 성과 속이 극명하게 나눠지는 순간을 포착했으며, 특히 극사실적인 인물들의 표정 묘사에서 극치를 이루는 그림들은 그가 단 한 번도 밑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다.
카라바조는 또한 17세기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물묘사로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곤 했던 화가다. 교회나 귀족들의 주문으로 그린 성화 속 주인공 예수나 성자, 성녀의 모습들을 로마 길거리의 거지, 집시, 건달, 노름꾼, 호색한들을 모델로 삼았고, 심지어는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자기 애인인 창녀로 채워 넣어 종교 지도자들을 경악시켰다. 이런 모험은 보통 사람이라면 종교재판에 끌려가고 죽음에 처해질 행위였지만 당시 최고 화가로 인정받았던 카라바조는 대담하게 자신의 예술을 온 세상에 떠벌리곤 했다.
내년 2월10일까지 이번 라크마 전시는 캘리포니아에서 최초로 소개되는 카라바조의 작품 8점과 함께 그의 영향을 받고 모방한 유럽 화가들이 그린 작품 50여점을 함께 보여주는 기획전으로 프랑스,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활동했던 조르주 들라 투르, 게리트 반 호토르스트, 벨라스케즈, 시몽 부에 등의 그림도 함께 볼 수 있다. 모두들 당대의 대가들이고, 같은 성화 속 소재를 다룬 그림들이지만 카라바조의 것이 얼마나 뛰어난 지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밀라노 출신인 카라바조는 21세 때인 1592년 로마로 이주하자마자 화가로서 유명해진다. 당시 큰 건축붐이 일고 있던 로마에서 교회와 귀족들은 그의 그림에 매혹됐고, 로마 입성 8년 만에 추기경으로부터 그림을 의뢰받은 최고 화가, 먹고 살 걱정이 없는 부자 화가로서 명성을 떨쳤다.
화실에서는 천재화가였으나 길거리에서는 구제불능의 불한당, 난폭하고 문란한 양성애자였던 카라바조는 술집과 사창가를 전전하며 부랑자들과 시비가 붙어 패싸움하기 일쑤였으며 1606년 돈을 걸고 로마 테니스장에서 경기하다가 말싸움 끝에 칼로 상대를 살해한다.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현상금이 걸린 채 말타섬으로 도망쳤다. 그런데 당대 최고 화가의 명성을 가졌던 그는 어느 곳엘 가든 그 지역 실세들의 환영을 받았고 계속해서 그림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 카라바조의 가장 훌륭한 걸작들은 4년여의 도피생활 기간에 나온 것들이다.
하지만 타고난 난폭한 성격은 사라지지 않아서 술 마시다 칼싸움을 한 후 나폴리로 도망갔고, 나폴리에서도 싸움을 벌여 상대를 칼로 찌른 뒤 시칠리아로 도망간다. 1610년 교황청에서 자신을 위한 사면 논의가 있다는 소식에 희망을 안고 마지막 그림 3점을 가지고 로마를 향해 출발한 카라바조는 그러나 도중에 전염병에 걸려 39세로 세상을 떠난다. 이후 그는 ‘살인자 화가’라는 원죄와 이탈리아가 겪은 격동의 역사 속에 세상에서 완전히 잊혀졌다.
무덤 속의 카라바조가 다시 등장한 것은 1911년. 유럽 문화문명 비평가 로베르토 롱기가 대학시절부터 카라바조의 그림을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의미와 후세에 미친 영향을 찾아내지만 그의 노력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이 들어서면서 중단된다. 카라바조의 명성이 전 세계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2010년 로마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카라바조 사후 400주년을 기념해 5개월간 열린 이 전시회는 세계 미술계에 엄청난 열풍을 불러일으켰고 카라바조에 대한 관심을 전 세계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됐다. 카라바조가 남긴 그림은 지금까지 80여점이 발견됐으며 아직도 유럽 곳곳에 미발굴 작품이 숨겨져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정하고 있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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