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여년 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이 나라는 너그럽고 여유로웠다. 진짜 ‘미국’ 같았다. 특히 대학들은 한국에서 온 우리가 보기에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관대했다. 유학생의 재정형편이 어려우면 그 배우자에게 일자리를 알선해주고, 그러다 배우자도 공부하겠다며 학교에 등록을 하면 두말 않고 학자금 지원방안들을 알아봐 주곤 했다.
유학생 가정에 아기가 태어나도 재정적 부담은 거의 없었다. 병원 소셜워커를 찾아가 ‘가난한 유학생’이라고 하면 병원비가 얼마이든 매달 5달러 정도씩 갚아나가게 조정을 해주었다. 한국에서 몸에 밴 것이 남을 눌러야 내가 사는 치열한 경쟁이고 사회복지라는 개념자체가 없었던 우리에게 미국사회의 여유로움은 낯설었다.
그리고 그 시대 미국의 여유로움은 지금 미국사회에서 낯설다.
불경기 이후 지난 5년 단골로 굳어진 말이 ‘예산적자’이다. 연방정부부터 주정부 시정부까지 모두가 ‘예산적자’라서 기존의 인력, 프로그램을 줄이고 깎고 없애는 것이 매 회계연도마다 연례행사처럼 되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띄게 타격을 입고 있는 것이 교육이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이번 선거에서 대통령 선택 못지않게 격렬한 대립양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 프로포지션 30이다. 제리 브라운 주지사가 부족한 예산을 메우기 위해 한시적 세금인상을 제안한 안으로 주로 교육예산을 충당하기 위한 궁여지책이다.
“세금 인상하면 소비가 위축돼 경제에 나쁘다”는 주장과 “교육예산이 더 깎이면 공교육은 무너진다”는 주장이 한인사회에서도 팽팽하게 맞부딪치고 있다. 캘리포니아 유권자 중 공립학교 학부모는 30%에 불과한 만큼 “남의 아이 교육에 내가 왜?”하는 반응도 없지 않다.
20년 쯤 전 우리집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였다. 넓은 교실에서 10여명 아이들이 선생님과 자유롭게 공부하는 모습을 보며 “이게 진짜 교육이구나!” 하며 감격한 때가 있었다. 한반에 60여명이 빼곡히 앉아서 수업 받던 한국의 초등학교 교실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지금 LA 공립학교의 현실은 그때와 많이 달라졌다. 교직원들을 계속 줄여서 교감이 두 학교를 동시에 담당하고, 청소 등 시설관리인은 세 학교를 한꺼번에 관리하며, 양호교사는 일주일에 한번 얼굴을 볼 수 있고, 음악? 미술교육은 구경하기 힘든 것이 요즘 많은 학교들의 형편이다. 고교에서는 카운슬러가 줄어들어 학생들이 진학상담 한번 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학교에 따라 차이는 있다. 아예 빈곤층 밀집지역의 학교는 연방정부의 지원을 받고, 부유층 지역 학교는 학부모들이 열심히 기금을 모아 학생들 특별활동을 지원한다. 문제는 그 중간, 부모들이 학교에 관심을 가질만한 정신적 재정적 여유가 없는 지역 학교들이다.
이렇게 반쯤 방치된 학생들이 제대로 교육 받지 못한 채 무더기로 사회로 나오는 것을 ‘남의 일’로 여긴다면 오산이다. 점점 전문지식이 요구되는 정보사회에서 일할 능력이 없어 낙오되는 인구가 늘면 그만큼 사회적 부담이 커진다. 우리가 낸 세금으로 먹여 살려야 할 대상이 늘어난다는 말이다. 대표적인 집단 중 하나가 죄수들이다.
지난 2011년 기준, 캘리포니아에서는 교도소로 할당된 예산(96억 달러)이 주립대학(57억 달러)에 할당된 예산 보다 많았다. 주정부가 연간 대학생 한명을 지원하는 비용은 8,667달러, 죄수 한명에 드는 비용은 거의 5만 달러이다. 지난 30년간 캘리포니아는 교도소 20개를 새로 지은 반면 대학 캠퍼스는 딱 하나 새로 세웠다. 범죄에 대한 강경 대처를 너무 주장하다 보니 생긴 일이다. 치안도 중요하지만 대학 보다 감옥에 돈을 더 쓰는 체제는 분명 잘못 되었다.
가정 살림이건 나라 살림이건 미래를 위한 투자가 없으면 희망은 없다. 20세기에 미국이 ‘미국’이었던 것은 미래에 돈을 썼기 때문이었다. 20세기 중반 미국은 우주개발, 사회간접자본 프로젝트, 어린이 복지, 각 분야 연구, 테크놀로지 개발 등에 많은 예산을 배정했다. 지금은 메디케어, 소셜시큐리티 등 당장의 지출을 메워나가느라 절절 매고 있다.
미래를 위한 가장 기본적인 투자는 교육이다. 프로포지션 30은 부자들에게 주머니를 좀 열라는 내용이다. 연소득 25만 달러 이상 고소득층의 소득세를 7년간 1~3% 올려 교육기금과 공공안전 기금을 보충하겠다는 취지이다. 판매세 인상(0.25%)도 포함되지만 일반 가정에 미치는 부담은 연간 몇십 달러 수준이다. 이 정도 희생으로 공교육을 지킬 수 있다면 해볼 만한 투자가 아닌가.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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