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여성이 처음 투표를 한 것은 1870년이었다. 그 전해인 1869년 와이오밍이 미국은 물론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허용했다. 이어 유타가 1870년 여성 참정권을 합법화했다. 1920년 연방헌법으로 여성의 참정권이 허용되기 50년 전의 일이다. 하지만 당시의 여성 투표권은 여권신장이나 여성해방과는 상관이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1860년대 와이오밍은 주민은 얼마 안 되고 뜨내기들이 많은 지역이었다. 캘리포니아나 오리건으로 향하는 서부개척자들, 광부들, 카우보이들, 철도공사 노무자들이 떼로 몰려다녔다. 지방 의회는 여성에게 참정권을 주면 와이오밍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주 가족이 늘 것이라는 계산을 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1890년 와이오밍은 주로 승격했다.
유타의 여성 참정권은 몰몬 교단의 작품이었다. 연방의회가 몰몬의 일부다처제를 불법화하려 하자 몰몬 교회가 정치권에 압력을 넣어서 여성 참정권을 허용하게 했다. 여성들은 교회와 남편의 지시에 따라 일부다처제 지지 투표를 했다. 여성을 굴종의 체제로 밀어 넣는 데 여성이 힘을 보탠 것이었다.
이런 투표 전력은 두고두고 ‘여성 참정권’의 발목을 잡았다. 여성참정권 반대론자들이 반대의 근거로 우선 내세운 것이 여성의 판단력에 대한 의심이었다. “아버지나 남편 따라서 투표할 게 뻔한 데 굳이 투표권이 필요한가?” “아니면 잘 생긴 남자에게 투표하려나?” 등.
그런 가하면 여성의 독자적 목소리에 대한 불안도 컸다. “여성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가정의 질서가 무너진다” “여성 투표권은 모든 가정을 지옥으로 만들 것이다”는 우려들이었다.
그로부터 근 100년이 지난 지금 여성의 표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이번 대선에서 여성 표는 특히 주목을 받고 있다. 여성들이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기 위해 저울질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투표가 얼마 안 남았는데 아직도 누구에게 표를 던질지 결정하지 못한 여성들이 많아서 오바마도 롬니도 애를 태우고 있다.
캘리포니아(오바마)나 텍사스(롬니) 같이 지지후보가 확실한 주는 뒷전이고 오하이오, 위스콘신, 아이오와, 버지니아, 플로리다, 콜로라도 등 경합주들이 사실상 다음 대통령을 뽑는 셈인데 그중에서도 결정적인 것이 여성 표심이라는 관측이다. 특히 이번에는 고졸 이하 학력의 블루칼라 백인여성들, 일명 ‘웨이트레스 맘’의 마음이 어디로 쏠리느냐에 따라 선거 결과가 달라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여성 표가 집단 표심으로 처음 주목을 받은 것은 1996년이었다. 자녀교육에 열심인 중산층 전업주부들에게 ‘사커 맘’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해 빌 클린턴이 재선에 성공한 것은 이들 여성 표의 힘이 크다. 교육, 가정, 육아, 낙태 등이 중심 이슈로 등장했다.
웨이트레스 맘은 지난 2008년 선거에서 전체 투표자의 9% 정도를 차지했던 집단이다. 이들이 경제와 이념 사이에서 마음을 못 잡으면서 유동층으로 남아있다. “4년 전보다 형편이 나아졌나?” 생각해보면 오바마를 찍기가 싫고 낙태, 남녀 임금격차 등 여성 이슈를 생각하면 롬니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다.
20세기를 통과하며 여성의 지위가 향상된 데는 3가지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투표권과 피임 그리고 교육이다. 투표권으로 법적 평등의 길이 열리고, 임신 조절로 몸의 자유가 얻어지고 교육으로 실력의 날개를 달면서 여성들은 수천년 남존여비의 족쇄를 끊어낼 수 있었다. 투표권도 피임·낙태의 권리도 균등한 교육 기회도 거저 주어진 것은 없었다. 여권운동 진영의 목숨 건 투쟁들이 있었다.
여성의 한 표는 이런 역사적 발전과 맥락을 같이 해야 한다고 본다. 여성 인재들이 파릇파릇한 새싹처럼 무서운 기세로 자라나고 있지만 각 분야의 상층부는 여전히 남성들 차지이다. 여성의 입장이 충분히 반영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번 선거 중 공화당 후보들의 강간/낙태 발언이 대표적이다.
연방상원 선거에 나선 토드 에이킨 의원(미주리)은 “강간으로는 임신이 안 된다”는 엉터리 이론을 펼쳤고, 리처드 머독 후보(인디애나)는 “강간을 통해서라도 생명이 잉태되었다면 그건 신의 뜻”이라는 말을 해서 여성들의 분노를 샀다. 내 딸이, 내 아내가 그런 상황이라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을지 그들은 먼저 생각해 보고 말을 했어야 했다.
대표를 잘못 뽑으면 피해를 입는 것은 약자들이다. 여성이고 이민자이고 소수계이다. 여성은 여성의 권익을, 이민자는 이민자, 소수계는 소수계의 권익을 지켜줄 대표를 뽑는 기회가 선거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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