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종영한 한국드라마 ‘골든타임’은 방영 내내 높은 인기를 모았다. 드라마 인기에는 의료계 현실을 생생히 다룬 점이 가장 크게 작용했지만 신랄한 현실 풍자도 한몫했다. 드라마에는 불우한 아이들을 돕다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한 중국집 배달원 병실을 국회의원이 방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진사 2명을 대동하고 등장한 이 국회의원은 혼수상태로 누워 있는 환자 옆으로 가더니 자못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기 시작한다. 사진사들은 이 모습을 놓치지 않고 “소변통을 지그시 응시하라”는 주문과 함께 셔터를 눌러댔다. 사진 찍기를 마친 국회의원은 환자 상태에 대한 질문 하나 없이 다음 일정을 핑계로 서둘러 병원을 떠났다. 쓴웃음이 절로 나오는 장면이다.
정치인들에게 이미지는 절대적이다. 유권자들에 어떤 모습으로 비춰지느냐가 자신들의 정치적 생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정치인들은 무엇보다 서민적이고 자상한 모습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선거철 재래시장과 봉사기관은 이들의 단골 방문지가 된다. 국가 안보와 관련해 강력한 지도자 이미지를 줄 필요가 있을 때는 군부대를 찾아 군복을 입고 잘 짜인 각본에 의한 포즈를 취한다.
이렇듯 이미지에 목을 매다 보니 간혹 무리수를 두기도 한다. 지난 13일 공화당의 부통령 후보 폴 라이언은 오하이오의 한 저소득층 급식단체를 찾았다. 라이언은 사진기자들 앞에서 앞치마를 두르고 잠깐 설거지를 한 후 떠났다. 그가 이곳에 머문 시간은 고작 15분에 불과했다.
그것도 사전에 이 기관의 허락을 받고 찾아온 것이 아니라 주말에 무작정 찾아와 문을 열게 한 후 벌인 퍼포먼스였다. 현장에 있던 기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혀 더럽지도 않은 접시들을 닦았다는 것인데 정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는 정치인이라면 부끄러워서라도 이런 연출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하이오를 차지해야 대선에서 이긴다”는 공화당의 강박증이 만들어 낸 볼썽사나운 광경이었다. 지난해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사진기자들을 불러 놓고 장애인 남학생의 벌거벗은 몸을 다 노출시킨 채 목욕봉사 사진을 찍게 해 말썽이 된 적이 있다.
정치인들이 그럴듯한 장면을 대중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마련하는 이벤트를 영어로는 ‘포토 오퍼튜니티’라고 한다. 닉슨 행정부 시절 백악관 공보실에서 처음 사용한 말인데 ‘사진 찍을 기회’라는 뜻 자체에서 벌써 정치인들과 언론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이 보인다.
정치인들은 대중에게 어필해야 하고 언론은 무언가 그럴듯한 그림이 필요하다. 미디어가 다양해지고 뉴스 수용자들의 기호는 갈수록 가벼워지면서 이미지에 집착하는 ‘화보정치’는 이제 범람수준에 이르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정치관련 보도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곧바로 확인할 수 있다. 이슈를 다루는 것은 별로 없고 정치인에 관한 뉴스가 대부분이다. 어느 때보다도 후보들의 철학과 비전을 파고들어야 할 대선보도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진다. 유권자들은 후보들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를 통해 국가의 살림을 맡길 사람을 고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작업모를 쓰고 연탄을 나르는 사진 한 장은 유권자들에게 ‘일하는 지도자’ ‘서민의 지도자’라는 인식을 주기에 충분했다. 그의 밑바탕이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는 청와대에 들어간 후에도 필요하다 싶으면 시장을 찾아 어묵을 먹고 상인들 손을 잡아주면서 이런 모습을 담은 사진과 동영상을 꺼져가는 이미지의 불씨를 살리는데 열심히 활용했다.
이미지는 글자보다 임팩트가 강하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자신을 어필할 수 있는 ‘사진 찍기’, 아니 ‘사진 만들기’에 열심인 것이다. 진정성 담긴 글과 말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진이 들어서고 있으며 사진은 점차 권력이 되고 있다.
흔히들 사진은 진실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맞는 말이 아니다. 사진은 카메라 셔터가 눌러진 순간의 찰나적 진실일 뿐이다. 그나마 현상적인 것일 뿐 피사체의 진심과 다른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이미지는 얼마든지 사람을 속인다.
어떤 정치논객의 표현처럼 이제 우리는 좋은 정치인처럼 보이는 인물을 뽑을 것이 아니라 실제로 좋은 정치인을 뽑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메시지에 알맹이는 없고 화보정치에만 능수능란한 속빈 강정을 솎아낼 수 있어야 한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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