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모 대학 동문회 월례모임에 초청받아 한글 외래어표기법을 놓고 토론했다. 이민연륜이 반세기 안팎을 헤아리는 ‘시니어’들이다. 한국어보다 영어가 편해 한글신문을 구독하는 분이 드물었지만 외래어 표기법엔 관심이 높았다. 한글의 우수성엔 이견이 전혀 없어도 한글의 외래어 표기법과 영어의 한글 표기법이 들쑥날쑥하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오늘아침 도우넛과 아린지 쥬스를 먹고 집을 나섰다. 옐로우 캡의 레이디오에서 레이 챨스와 쉐리 죤스의 째즈가 흘러나왔다. 윈도우 밖을 내다보니 수퍼마켙 옆 맥다놀의 드라이브-트루에 브렉훠스트를 사려는 출근자들의 차량이 늘어서 있었다. 오늘 쎈츄리 휄로우쉽 교회에서 열린 리더쉽과 비젼에 관한 쎄미나에는 많은 크리스챤들이 참석했다.”
이명박 정부 출범당시 이경숙 인수위원장이 이런 일기를 썼을 듯싶다. 미국인들은 오렌지를 ‘아린지’로 발음해야 알아듣는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한국의 외래어표기법은 원어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기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통일되게 적도록 하기 위한 약속이자 기준이다. 말하는 외국인이 주체가 아니라 그 말을 한글로 적는 한국인이 주체다.
위의 일기를 외래어표기법에 맞춰 고쳐 쓰면 “오늘아침 도넛과 오렌지 주스를 먹고 집을 나섰다. 옐로 캡의 라디오에서 레이 찰스와 셰리 존스의 재즈가 흘러나왔다. 윈도 밖을 내다보니 슈퍼마켓 옆 맥도널드의 드라이브-스루에 브렉퍼스트를… 오늘 센추리 펠로십 교회에서 열린 리더십과 비전에 관한 세미나에는 많은 크리스천이 참석했다”가 된다.
외래어표기법에는 다섯 가지 원칙이 있다. 우선, ‘남는 소리’ 즉 하나마나한 소리는 적지 않는다. 주스와 쥬스는 소리를 구별하기 어렵다. 찰스와 챨스, 존스와 죤스, 비전과 비젼도 마찬가지다(ㅈ과 ㅊ에는 ‘ㅑ, ㅕ, ㅛ, ㅠ’ 대신 ‘ㅏ, ㅓ, ㅗ, ㅜ’가 붙는다). 장모음이나 이중모음은 인정하지 않는다. 보우트는 보트, 레인보우는 레인보, 오오사카는 오사카다.
외래어 받침은 ㄱ,ㄴ,ㄹ,ㅁ,ㅂ,ㅅ,ㅇ만 쓴다. Market은 마켓, Book은 북, Top은 톱이다. th 발음은 ㅅ으로만 표기한다. 땡큐가 아니라 생큐이고, 띵크가 아니라 싱크이다. 된소리를 쓰지 않는 원칙에 따라 째즈는 재즈, 모짜르트는 모차르트, 씨애틀은 시애틀이 맞다. f는 ㅍ으로만 적는다. 홰밀리는 패밀리, 훠스트는 퍼스트, 훼드럴웨이는 페더럴웨이다.
한인들이 위의 명문대 동문 어르신들처럼 외래어 표기법에 관심 갖기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 그렇게 중요한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는 후세들의 한글교육 문제가 더 긴박하다. 요즘엔 한글교육의 중요성을 인식 못하는 부모가 거의 없다. 모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저절로 일어난 현상이다. 한국어 공부를 위해 자녀를 한국에 유학 보내는 부모들도 있다.
지금 미국에는 동부의 미주한국학교 협 의회 산하 14개 지역에 1,200여개, 서부의 미주한국학교 연합회 산하 5개주에 250여개 등 약 1,500개 한글학교가 산재한다. 웬만한 한인교회는 모두 주말 한글학교를 운영한다. 시애틀 지역처럼 규모가 큰 ‘통합 한국학교’를 세워 보다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곳도 있다. 본국 관계당국도 이런 학교를 선호한다.
한글학교는 지구촌 어디에나 있다. 그래서 한국정부의 지원금이 푼돈으로 분산된다. 교사의 자질이 의심되는 한글학교도 많다. 지원금을 노린 유령학교도 있다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모국어 교육의 열성을 막을 필요는 없다. 특히 교회 한글학교는 2~3세 신도들을 확보해야하는 교회의 본질적 요구와 맞물려 정부 지원금과 관계없이 계속 생겨날 터이다.
한글이 직면한 진짜 문제는 외래어 표기법의 혼란이나 한글학교의 난립이 아니다. 유네스코가 인류유산으로 지정했고 요즘엔 외국에까지 ‘수출’되는 한글 그 자체가 심하게 훼손되고 있다. 인터넷 채팅방에는 맞춤법도, 표기법도 무시한 국적불명의 엉터리 한글이 눈을 어지럽힌다. 더욱이 이번에 566주년을 맞은 한글날(10월9일)은 22년째 공휴일 대접을 못 받고 있다. 세종대왕이 살아계시면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라며 한탄할 것 같다.
<지니 조 마케팅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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