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으로 우리는 밥을 먹고 말을 한다. 밥과 말이 모두 중요하지만 밥이 말보다 더 다급하다. 밥이 없으면 생명을 이을 수 없고, 생명이 없으면 말도 없다. 그러니 밥이 먼저다, 밥을 먹여줄 테니 말을 하지 말라는 조건이 붙던 시대가 있었다. 60년대와 70년대 박정희 시대였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평가는 단순화하면 밥과 말에 대한 입장에 따라 갈라진다. 조상 대대로 배곯던 국민들에게 밥을 배불리 먹게 한 공적 즉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우상이다. 박근혜는 박정희의 살아있는 이미지, 신화의 환생이다.
사람은 밥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고 믿는 사람들에게 박정희는 독재자이다. 말 즉 언론의 자유를 빼앗음으로써 그는 민주화의 흐름을 막는 죄를 범했다. 불온한 말들이 나라의 근간을 흔든다고 믿은 그는 말하는 자들의 입을 막고 헌법을 고쳤다. 택시 안에서도 술집에서도 친구사이에서도 말을 조심해야 했던 그 시절 많은 사람들은 숨죽이며 살았다. 숨을 죽여야 살 수 있었다. 박정희는 공포의 통치자였다. 아버지에 이어 대통령이 되려는 딸에게 그들은 박정희 시대에 대한 역사적 인식을 묻지 않을 수가 없다.
박근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박정희 시대에 대해 사과를 했다. “5.16, 유신, 인혁당 사건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 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한다” 며 “이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입은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사과한다고 발표했다.
“역사의 판단에 맡기자”던 기존의 입장을 그가 갑자기 바꾼 것은 물론 지지율 때문이다. 안철수 후보가 등장하면서 지지도가 눈에 띄게 흔들리자 특단의 조치를 취한 것이다.
‘사과’의 결과가 기대만큼 좋지는 않아 보인다. ‘밥’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아버지에 대한 배신’이라고 흥분하고, ‘말’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마음이 담기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예수가 잡히던 밤 어린 여종의 물음에 조차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한 베드로에 박근혜를 비교하기도 한다. 베드로는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박근혜는 흔들리는 대권기회를 다잡기 위해 존재의 뿌리 같은 신념을 부인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해 딸이 사과를 해야 할까? 아니라고 본다. 그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다고는 하지만 20대 어린 나이에 통치에 관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버지의 과오는 아버지의 영역일 뿐 딸에게 그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하지만 그 딸이 대통령이 되겠다고 하면 말은 달라진다. 사과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밝힐 의무가 있다. 대선후보에게 역사관 검증은 필수다. ‘박정희 통치 18년’이 한국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가 큰 만큼, 박근혜에게 아버지의 존재가 절대적인 만큼 그 시대에 대한 생각을 묻는 것은 필요하다.
한국의 저명인사들이 아버지에 대해 쓴 글을 모은 ‘나의 삶, 나의 아버지’라는 책이 있다. 이 책에 실린 ‘아버지의 딸로서’라는 글에서 박근혜는 “나의 부모님은 내 삶의 모델이다. 특히 정치인이 된 지금 아버지는 그냥 아버지가 아니라 선배이자 스승이며 나침반과 같은 존재”라고 썼다. 그가 정치인이 되고 대통령이 되려는 데는 ‘아버지의 딸로서’의 자기인식이 강하다는 말이 된다.
그는 대통령의 딸로 13년, 퍼스트레이디로 5년을 살았다. 모두가 감탄하는 그의 고고한 기품과 극도의 절제력은 이런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울러 그가 세상을 보는 시각 역시 같은 맥락으로 형성되었을 것이다. 박정희 시대 그의 경험은 북한의 위협과 미국의 압박, 그리고 불온한 반정부 세력들의 책동 속에서 사심 없이 소신을 가지고 오로지 국익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 그 무한한 존경심으로 축약될 것이다.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 소리 호르락 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 소리/ 신음 소리 통곡 소리 탄식 소리”(김지하 ‘타는 목마름으로’ 중에서)를 그는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고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같은 시 구절을 가슴 두근거리며 읽어본 적도 없을 것이다. 그 시대에 대한 그의 경험은 반쪽의 경험이고, 배부름과 말의 목마름 사이에서 꿈꾸고 좌절하던 국민들의 보편적 역사 인식에 가서 닿지 못한다. ‘아버지’라는 거대한 존재가 가로 막고 있기 때문이다.
박근혜에게 아버지는 날개이자 높은 벽이다. 아버지를 날개로 정치인 박근혜가 탄생했다. 이제 국민의 희망과 절망까지도 헤아리는 대통령이 되려면 그는 아버지라는 벽을 넘어서야 한다. 딸이라는 사사로운 인연을 넘어서야 ‘박근혜 대통령’이라는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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