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기가 되면서 대학입시 열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12학년 자녀가 있는 가정은 이미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10월6일의 SAT가 입학원서 제출 전까지는 마지막 시험기회이기 때문이다. 남은 3주간 열심히 공부해서 점수를 올려야 한다는 부담으로 학생들은 긴장하고, 부모들은 기도한다.
‘대학’ 특히 ‘명문’에 대한 우리의 집착은 강하다. 평생 걸어가게 될 길을 결정하는 ‘문’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치열한 경쟁의 문과 문을 통과하며 성공이라는 이름의 고속도로로 진입하려는 것인데, 그 과정에서 한번 밀리면 그만큼 ‘고속도로’가 멀어지니 학부모들의 닦달은 근거가 있다. 다른 집 자녀들은 의사, 변호사 되고 대기업 취직해서 쾌적한 고속도로를 달릴 때 내 아이는 흙먼지 나는 비포장도로를 헤매고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다.
그런데 모든 길은 길로서 가치가 있다고 웅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생의 찬비 맞으며 좌절하고 낙오하는 경험이 오히려 삶을 치열하게 만든다는 산 증인들이다. 요즘은 김기덕이 그 증인이다.
김기덕 감독이 베니스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받은 것이 화제 중의 화제이다. 한국 영화의 숙원이던 세계 3대 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거머쥔 사람이 하필이면 한국영화계에서 비주류 중의 비주류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영화가 인기 장르가 되면서 지난 90년대 이후 문과계열에서 똑똑하다는 인재들은 영화계로 몰렸다. 고학력과 재능, 자본이 모여드는 영화판에서 김기덕은 태생적 아웃사이더였다. 그의 아득한 소외감은 수상 소감에도 잘 담겨있다.
수상 후 귀국 기자회견에서 그는 “황금사자 트로피를 받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건 청계천에서 무거운 구리박스를 지고 가던 15세의 내 모습이었다”고 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교복 입은 또래들을 보면서 소년 김기덕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스스로가 말한 ‘열등감을 먹고 자란 괴물’이라는 표현은 더도 덜도 아닌 사실일 것이다.
그의 삶에 길은 보이지 않았다. 지독한 가난으로 청계천과 구로공단에서 청소년기를 보냈고 암담한 20대를 해병대에 자원입대해 혹독한 군생활로 보냈다. 길 없는 길 위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시도는 멈추지 않았던 것 같다. 목사가 되려고 야간 신학교에 다닌 적도 있고, 거리에서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다.
그의 가슴에 처음 예술에 대한 불을 지핀 것은 그림이었다. 가진 것 없고 배운 것 없이 “이 땅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냉혹한 깨달음과 함께 그는 그림을 그리겠다며 프랑스로 떠났다. 달랑 비행기 표 사들고 무작정 뛰쳐나간 낯선 땅, 아는 사람 하나 없고 불어 한마디 못하는 그의 생활이 어떠했을 지는 상상에 맡길 뿐이다.
그런데 거기서 32살의 그는 운명을 만났다. 영화가 처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이다. 정규교육 없이 본능과 재능에 의지해 시나리오를 쓰고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 김기덕의 삶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내용은 하나같이 파괴적이고 엽기적이며 잔혹하다. 인간이 극한까지 내몰리며 괴물이거나 악마가 된 모습들이다. 처절하게 뒤틀리고 망가진 악의 심연에서 한줄기 용서와 구원 그래서 희망을 길어내는 것이 그의 영화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성공과 안락의 ‘고속도로’와는 너무도 먼 이야기, 그래서 우리는 불편하다. 멀쩡한 여대생을 창녀로 만드는 이야기(‘나쁜 남자’) 앞에서 누가 편하겠는가. 세상의 밑바닥을 몸으로 부딪치며 체득한 이미지들을 그는 날것의 예술성으로 풀어내고 있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이야기들, 자신의 삶을 재료로 버무려낸 요리들이다. 김기덕을 좋아할 필요는 없지만 김기덕 같은 인물이 있어 한국 영화는 그만큼 풍성하다.
‘고속도로’는 안락함이 장점이자 약점이다. 안락해서 좋고, 안락하니 도전을 하지 않는다. 일찌감치 안주하기 쉽다. 반면 비포장도로 혹은 길 없는 벌판에 던져지면 실패의 쓰라림이 약점이자 강점이다. 안주할 수 없으니 도전하게 되는 것이다.
위키피디아의 창업자인 지미 웨일스가 지난 봄 서울대에서 창업에 관한 강연을 했다. 위키피디아로 성공을 거두기 전 그는 숱한 실패의 경험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온라인 음식 주문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했고, 검색 엔진도 만들었지만 번번이 실패였다. 하지만 그런 실패의 경험이 자양분이 되어서 위키피디아를 만들 수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모든 삶의 여정에는 그 길에서만 얻을 수 있는 독특한 경험들이 있다. 그리고 그 경험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고속도로’로 곧장 연결되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15살 청계천 노동자의 길이 황금사자 트로피로 연결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junghkwon@koreatimes.com
권 정 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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