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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찬 부국장대우/경제팀장
수년전 한국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른 새벽에 인천공항의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한 뒤 우연히 대형 현수막을 보고 어이가 없었다. 기부 문화에 대한 관심을 높이자는 취지의 현수막이었던 모양인데, 기부를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준다는 뜻과 발음이 비슷한 ‘기브(Give)’로 표현했고, 많이 하자 또는 높이자는 의미로 ‘Up’을 따로 써놓았다. “기부를 많이 합시다”라고 말하고 싶은 모양이지만 영어 문장으로는 ‘Give Up’이 됐다. 한국어를 모르는 외국인이 볼 때는 한국에 방문하자마자 ‘포기해’라는 경구를 본 셈이다.
영어가 한국속에 지나치게, 또는 어설프게 들어가다보니 생긴 해프닝이다.
한국에서 영어가 자리잡은 것은 가요와 TV의 영향이 크다. 어지간한 아이돌의 노래에는 영어 가사가 들어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감탄사는 이미 ‘Oh my God’이 대세다.어떤 한국의 광고에는 ‘가Go’, ‘보Go’ 라는 식으로 한국말인지, 헷갈릴 정도로 영어를 혼용해 사용하고 있다.영어가 국제어라는 점을 감안하면 영어 사용에 대해 시비를 걸기는 쉽지 않다.
영어를 이용한 일종의 말장난이나 가요에 포함된 영어 가사 등도 딱히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시대적인 조류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지나친 영어 사용이 조금 심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는 없다. 이같은 영어 사용이 일반인의 생활이나 엔터테인먼트의 영역에서 공적인 분야로 넘어가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한국을 대표하는 정부부처나 바른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언론 등에서 불필요한 영어를, 또는 엉터리 영어를 남발하는 모습은 영 거슬린다.
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올해초 4개월사이에 15개 정부 부처의 보도자료에서 외래어와 외국어를 오·남용한 사례가 무려 238건에 달했다. 국립국어원이 이러한 문제를 개선하려고 2년 전부터 쉬운 한글로 바꿀 것을 각 부처에 권고하고 있지만, 전혀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표현들이 ‘음란물 클린 시민운동’(행정안전부), ‘법률 홈닥터’(통일부), ‘토요 스포츠데이’(문화체육관광부), ‘영 파머’(농림수산식품부) ‘저나트륨 조리 레시피’(보건복지부) 등이다. 정부에서 이렇게 영어 사용에 열심이니, 다른 민간업체나 일반인들의 영어 사용에 대해 나무랄 입장이 아니다.
우스개소리로 한국에는 ‘화장실’이 없다고 한다. 대신 ‘toilet’이나 ‘restroom’이 있을 뿐. 냉수와 온수는 ‘ice’와 ‘hot’으로 표기돼 있고, 심지어 ‘물은 self’가 공식 표현이 될 정도다. 헌혈 캠페인에는 ‘blood donor’가 등장해 영어를 모르면 헌혈도 못한다는 자조적인 말까지 나왔다고 한다.
하긴 유별난 영어 사용은 현 정권의 특징이기도 하다. 정권 초기부터 ‘어린쥐’ 발언으로 비웃음을 사더니, 대통령의 영어 연설, 결국 한미 FTA 협정문의 엉터리 번역 등으로 국제적인 망신을 사기도 했다.
언론에서도 이같은 행태는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의 보수적인 모 일간지는 기사속에서 ‘일터’라고 쓰면서 영어로 굳이 ‘workplace’라고 병기하고, 심지어 5년전 버지니아공대 조승희 사건 후 영결식 당시 1면 탑기사의 제목을 아예 영어로 ‘Let’s go Hokies’라고 대문짝만하게 쓴 적도 있다. 미국에서 그 기사를 보는 순간 이게 한국 신문인지, 미국 신문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기억이 새롭다.
언어는 사용자의 의식을 표현하기도 한다.
어떤 단어를,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그 사용자의 의식을 엿볼 수 있다. 조승희 사건 당시 한국 정부와 언론들의 감정은 한국인이 미국에서 사람을 죽여 죄송하다는 의식이 숨어있었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미국에 사는 한인들도 몰랐던 버지니아공대의 응원 구호를 한국에서, 그것도 영어로 써서 실었을 까닭이 없다. 마치 9.11 당시 미국에 사는 이슬람계들이 더욱 강하게 빈 라덴을 욕하고 비난하는 것과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영어의 중요성을 간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어에 대한 자긍심이 없다면 문제다.
언어는 문화를 다른 시대로 전달하고, 언어는 자신의 생각을 명료하게 하고, 행동을 통제하는 기능이 있다. 또 언어는 개인의 개성과 인격을 나타내기도 한다. 지난주 뉴욕 일원의 각 한글학교가 일제히 개강했다. 미국에서 자라는 한인 1.5세, 2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은 이제 필수가 됐다. 미국에서는 한국어에 대한 소중함과 문화를 가르치는 일에 열심인데, 한국에서는 영어 배우기가 한창이라는 점이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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