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면서 점점 더 멋지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본 가장 멋있는 노인은 플라시도 도밍고(71)다.
흰 머리에 흰 수염, 그리고 아직도 뭇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멋진 풍채를 가진 그는 무엇보다 지금껏 세월에 바래지 않은 맑고 힘있고 완벽하게 아름다운 목소리가 경탄스럽다. 나는 그가 출연하거나 지휘한 오페라와 연주회를 여러차례 관람한 적이 있는데 모든 공연은 도밍고라는 존재로 인해 찬란하게 빛이 났다. 바로 지난 달 할리웃보울에서 구스타보 두다멜 지휘로 ‘그라나다’를 열정적으로 부르던 그의 목소리는 지금도 내 귓전을 울리며 가슴 뛰게 한다.
뉴스위크가 ‘오페라의 제왕’이라 부른 도밍고는 400년 오페라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가수로 꼽힌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오페라 역을 노래한 테너로, 오는 15일 LA오페라가 초연하는 베르디의 ‘포스카리 가의 두사람’(The Two Foscari)에서 생애 140번째 역을 맡을 예정이다.
노래하고 지휘하고 감독하고, 테너와 바리톤을 넘나들며 테너 중에서도 레제로, 리릭, 드라마티코를 자유자재로 표현하는 그는 지난 7월 칠레에서 3,600번째 공연기록을 세웠다. 오페라와 크로스오버 등 장르를 불문하고 레코딩된 그의 음반은 100개가 넘고 11개의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스페인, 멕시코, 영국, 이탈리아 정부가 모두 최고 영예의 메달을 수여했고, 옥스퍼드대학과 하버드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음악계의 진정한 르네상스 맨’이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찬사를 제쳐두고 도밍고가 우리 앤젤리노들에게 특별히 더 소중한 것은 오늘의 LA오페라는 바로 그가 만들어낸 역작이기 때문이다. 모두들 문화예술의 불모지라고 하찮게 여겼던 80년대초 LA에서 도밍고는 무한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고 오페라단 창설을 주도했다.
84년부터 예술자문으로 참여했던 그는 86년 LA오페라 창단공연 ‘오텔로’에서 주역을 맡았고, 이후 예술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003년부터는 총감독을 맡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의 명성과 지원과 열정으로 LA오페라는 불과 27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미국에서 네 번째로 큰 오페라단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2년전에는 ‘오페라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바그너의 ‘링 사이클’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고 있는지, 그가 우리 곁에 있음이 얼마나 고맙고 다행이고 영광인지, 그가 떠나고 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멕시코에서 성장한 플라시도 도밍고는 원래 피아노와 지휘를 공부했다. 1959년 멕시코 국립오페라 오디션에 바리톤으로 지원했는데 심사위원들이 테너 아리아를 시켜본 다음 테너로 기용한 스토리는 유명하다. 그런데 그는 4년전부터 다시 바리톤으로 돌아가 그의 활동영역을 누구도 넘보지 못할 만큼 넓혀가고 있다.
올해 LA오페라가 잇달아 초연하는 베르디의 ‘시몬 보카네그라’와 ‘투 포스카리’에서 바리톤 주역을 노래하는 그는 얼마전 ‘리골레토’와 ‘타이스’(아타나엘)도 성공적으로 공연했고 내년에는 베르디 탄생 200주년을 맞아 4개의 새로운 역들(‘일트로바토레’ ‘나부코’, ‘라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조반나 다르코’의 아버지)에 도전, 144번째 역을 달성할 계획이다.
“쉬면 녹슨다”(If I rest, I rust)라는 말을 달고 사는 도밍고는 올해만도 80여회의 공연을 소화해내고 있다. 후반기 스케줄만 보아도 북경에서 지휘하고 취리히로 갔다가 칠레와 페루 공연을 거쳐 이탈리아 베로나에서 지휘하고 런던과 오스트리아, 그리고 LA의 ‘투 포스카리’ 초연 후에는 스페인으로 건너갔다가 스웨덴 공연이 이어지는 식이다.
지난 5일 기자회견에서 그 많은 역의 노래를 어떻게 암기하느냐고 묻자 도밍고는 “너무 많은 역을 여기서 저기서 공연해야 하기 때문에 늘 공부하고 있다”면서 “주로 비행기 안에서 공부하고 악보를 읽는다”고 했다. 장거리여행이 많기 때문에 방해받지 않고 혼자 있을 수 있는 비행시간이 가장 좋은 기회라는 것. “아직까진 기억력이 녹슬지 않아서 집중하면 암기할 수 있다”는 그는 다만 시간이 없어서 안타깝다며 더 빨리 사라져가는 시간을 안타까워했다.
우리 생애 이 위대한 가수의 라이브 공연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이나 될까? LA에 사는 우리는 오히려 그가 가까이 있기 때문에 귀한 기회들을 흘려보내는 것은 아닐까?
<정숙희 특집 1부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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