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좀 의아했다. 한국의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대선출마 선언을 하면서 공약으로 내세운 슬로건이다. 대선공약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얄팍하게 감성을 건드리는 문구가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 보다 더 뜻밖이었던 것은 한국 국민들의 반응이다.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박목월 ‘나그네’ 중) 같은 시 구절 혹은 추억 속 어느 저녁풍경을 떠올리게 하는 그 한가한 문구가 예상외로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블로그 마다 소셜네트웍 마다 ‘저녁’에 대한 이야기로 그득하다.
“초등학교 이후로 저녁 있는 삶을 즐겨보지 못했다. 중학교 때는 학원 다니느라, 고등학교 때는 야간자율학습 하느라, 대학생 때는 취직시험 준비하느라, 취직해서는 야근하느라 … ”
‘저녁’이라는 시간이 없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인정사정없는 성과급제, 피 말리는 경쟁, 회식과 접대문화 … 가족과 먹고 살기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하고, 그러자니 가족과 밥 먹고 산책하는 평범한 저녁은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것이다.
‘저녁이 있는 삶’ 문구가 가슴속에 눌러두고 있던 어떤 상실감을 건드리는 것 같다. “사는 게 이게 아닌데…” 싶은 회의, 근원적 목마름이다.
올해 한국 대선에서는 ‘행복’이 주요 이슈가 될 모양이다. 배고프던 시절에는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가 온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가치였다. 앞만 보고 내달린 성장·개발주의로 선진국 문턱에 도달하자 ‘세계 11위 경제대국’ ‘국민소득 2만 달러’ 등 외형이 국민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 국민들은 내부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 같다.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이다. 이런 변화를 정치인들이 파악한 것 같다.
박근혜 새누리당 전 비상대책위원장은 ‘5천만 국민행복플랜’을 대선공약,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슬로건으로 정했다. 5천만 국민이 ‘내 꿈’을 이룬다면 그야말로 행복한 나라일 것이고 저녁이 있는 삶일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의 문제가 남지만 국가의 성장에서 국민의 삶의 질로 정치적 지향점이 바뀌었다는 것은 의미가 있다. 국내총생산(GDP)에서 국민총행복(GNH)으로의 전환이다.
‘행복한 나라’를 말할 때 보통 두 나라가 꼽힌다. 복지국가의 모델인 덴마크 그리고 GNH를 창안한 나라 부탄이다.
덴마크는 행복 보고서마다 단골 1위 국가이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보고서에서도, 지난 4월 유엔의 세계 행복보고서에서도 1위다. 유엔 보고서에서 한국은 150개국 중 56위(미국은 11위). 소득보다는 정치적 자유, 탄탄한 사회관계망, 부패 정도, 그리고 개인적 차원에서는 심신의 건강과 일자리의 안정성, 가족관계의 긴밀함 등에 비중을 두면서 내려진 결과이다.
한국은 이제까지 별로 행복하지 않은 나라로 꼽혀왔다. 지난해 OECD 보고서에서 34개 회원국 중 26위였는데, 10일 한국에서 발표된 ‘OECD국가 삶의 질’에 관련 연구에서는 오히려 32위로 떨어졌다. 빈부격차가 날로 벌어지고, 계층이동성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는 것이 행복감을 빼앗는 가장 큰 이유로 지적되었다.
덴마크의 행복 비결은 세금 많이 내서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것이다. 최고 60%에 달하는 세금으로 국가는 전국민에게 의료, 교육 등 모든 복지혜택을 무료로 제공한다. 요람에서부터 무덤까지 안락한 삶이 보장되니 국민은 스트레스 받을 일이 별로 없다. 주 37시간 근무에 휴가는 연간 6주. 가족친지들과 자주 어울리며 사는 것이 덴마크 식 삶의 방식이다.
반면 부탄의 행복 비결은 다른 가치관이다. 가진 것 없어도 서로 나누며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았던 과거 한국의 시골생활을 생각나게 한다. 인구 70만에 1인당 소득은 2000달러도 안 되는 풍요와는 거리가 먼 나라이다. 그런데도 국민들은 행복해 한다. 40년 전 4대 국왕인 지그메 싱예 왕추크 왕이 경제적 발전보다는 국민의 행복을 통치의 기본으로 선포하면서부터이다. 그가 만든 GNH는 이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덴마크와 부탄은 객관적으로 전혀 다르지만 공통점이 있다. 빈부격차가 별로 없다는 것 그리고 정부에 대한 신뢰도가 높다는 것이다. 세금을 아무리 많이 내도, 다른 나라들에 비해 아무리 가난하게 살아도 정부가 국민을 위해서 정직하게 일한다는 신뢰감이 있다.
이제 한국도 ‘행복의 나라’로 나갈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5천만 국민행복은 몇 가지 정책변화로 얻어지지 않는다. 정부에 대한 기본적 신뢰가 있어야 국민은 행복해질 수 있다.
권 정 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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