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한인회사 사장은 직원들과의 회식을 즐겨한다. 술자리에서 상사와 직원들 간에 소통과 화합이 이뤄진다는 한국식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직원들은 ‘10년 감수’한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마시기 때문이다.
한국 직장 회식에 으레 등장하는 것이 폭탄주다. 글래스에 얼음, 맥주, 양주, 소주를 적당한 비율로 채워 야구장 관중의 웨이브(파도타기)처럼 연달아 마신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밀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썰물) 몇 차례 돌고나면 ‘필름이 끊기는’ 직원들이 속출하곤 한다.
집단폭음 문화는 한국을 4반세기나 통치한 군부정권 때 뿌리내렸다. 계급사회인 군대의 특성상 술자리는 충성과 단합을 확인하는 필수 코스였다. 전투하듯 경쟁적으로 마셨고 어떤 이유로든 못 마시는 사람들은 왕따 당하기 일쑤였다.
두주불사가 호걸의 판단기준이 됐다. 자기 군화에 독주를 가득 부어 마시는 ‘몬도가네’ 식 음주가 해외토픽이 됐었다.
군사정권이 끝난 지 4반세기가 됐지만 한국의 폭음문화는 여전하다. 세계보건기구(WHO)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연간 1인당 독주(증류주) 소비량은 9.57리터로 단연 세계 톱이다. 보드카 주정뱅이가 많다는 러시아는 6.88리터로 한국인의 3분의2 수준에 불과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증류주가 바로 한국의 ‘참이슬’ 소주이다. ‘처음처럼’도 3위에 올랐다.
요즘 한국에서 조폭(조직폭력) 아닌 ‘주폭’(酒暴: 주취폭력)이 사회이슈로 대두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 한국인은 2010년 한해 성인 1인당 소주 67병에 맥주 101병을 마셨다. 성인의 4.2~10.9%가 술 의존(중독) 상태였다. 작년에 발생한 살인사건의 37.1%, 강간사건의 30.6%, 폭행사건의 35.7%, 공무집행 방해의 73.2%가 주정뱅이에 의해 저질러졌다.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으로 떠오른 한국이 음주문화의 후진국(야만국)으로 꼽히니 아이러니다. 노상에서 고성방가하거나 방뇨하는 만취자도 너그러이 봐준다.
주폭 신고가 월간 6만 여건에 달하지만 대부분은 작취미성의 ‘심신미약’ 상태라는 이유로 훈방되고 고작 0.2%만 구속된다. 경관도, 검사도, 변호사도, 판사도 뿌리 깊은 폭음문화에 젖어 있는 탓이다.
반갑게도 그런 폭음문화가 개선될 조짐이다. 지난달 서울경찰청이 ‘주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3주 만에 주정뱅이 32명을 구속했다. 대법원도 이에 호응하듯 지난주 주폭사범에 대한 양형기준을 강화했다. 만취해 저지른 범행이라는 이유로 법원이 주폭사범의 형을 깎아주는 이른바 ‘주취감경’을 극도로 제한하고 상습범의 경우 오히려 가중처벌하기로 결정했다.
김황식 국무총리도 거들었다. “인구 5,000만명, 1인당 GDP 2만달러 이상의 소위 ‘20-50’클럽에 진입한 한국이 그에 걸맞은 선진사회로 발전하지 못한 게 아쉽다”며 폭음 병폐를 바로잡으려는 사회적 노력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다짐했다.
요즘 제주도민들은 1가지 술로 1차만 마시고 밤 9시 이전에 술자리를 뜬다는 ‘119 음주문화 개선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조폭 위에 주폭 있다’는 한국경찰의 경구는 미국에선 통하지 않는다. 시애틀의 한 원주민 주정꾼은 조각용 주머니칼을 손에 들고 길을 걷다가 경찰에 총격당해 죽었다. 주폭이 아니라도 만취한 사람이 있다는 신고만으로 경찰이 득달같이 달려와 체포한다.
‘익명의 술 중독자 모임’(AA) 등 재활을 돕는 사회기관도 많다. 최근 등산 갔다가 정상의 숲속에서 AA 회원들이 모여 토론회를 여는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다. 이들은 한인들도 자주 가는, 고도가 꽤 높은 그 산에 정기적으로 오르며 체력증진과 함께 재활의지를 다진다고 했다.
꼭 2주전 한 교우의 장례식이 있었다. 거의 40년을 술에 의존했지만 남을 해코지하는 주폭은 아니었다. 작년 겨울 뇌졸중을 일으킨 후 건강이 급전직하했다. 폐암이 발견돼 한쪽 폐를 절단했고 이어 췌장도 떼어냈다. 두달 전엔 간에서도 이상이 발견됐다.
‘주폭’은 술을 마시는 본인부터 희생시킴을 관에 뉘인 그의 초췌한 얼굴이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윤여춘/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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