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전문가들의 예측을 뒤엎고 지난주 연방대법원은 5대4로 오바마 대통령 제 1임기의 최대의 치적으로 꼽히는 건강보험개혁법(이하 건보법)의 합헌성을 인정하는 판결을 발표했다. 더욱 놀라웠던 것은 다수 의견을 쓴 사람이 바로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었다는 사실이다.
로버츠 대법원장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2005년에 지명했다는 점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공화당에 속했던 보수주의자이다. 그래서 세간의 예측은 로버츠와 4명의 보수계 대법원 판사들이 건보법 전체를 위헌 판결하거나 적어도 개인이 보험을 사지 않으면 벌금을 물리도록 하는 조항을 위헌이라고 판결함으로써 그 법의 나머지 조항들의 집행을 어렵게 만들어 건보법이 유야무야가 되게 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로버츠가 다수의견을 읽기 시작했을 때 개인들이 보험을 사지 않으면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한 내용이 연방의회가 주들 사이의 통상을 규제할 수 있는 고유권한 아래서 정당화가 불가능하다는 뜻의 말을 먼저 했다. 그래서 잠깐이지만 CNN과 FOX 뉴스 등은 건보법이 위헌 판결되었다는 오보를 띄우는 해프닝마저 있었다.
그러나 로버츠는 보험을 사지 않는 개인들에게 벌금을 물릴 수 있는 근거를 연방의회의 세금징수권에서 발견하는 친절(?)을 보여줌으로써 사법부는 소위 민의를 가장 민감하게 반영하는 입법부의 입법을 될 수 있으면 존중한다는 3권 분립 아래의 균형과 견제에 대한 합리적 이해를 나타냈다.
로버츠는 대법원에서 진보적인 스티븐 브라이어(클린턴 대통령 임명),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클린턴), 소냐 소토마이어(오바마) 그리고 엘레나 케간(오바마) 네 판사들과 함께 오바마에게 극적인 승리를 안겨 주었다. 4명의 소수의견 판사들은 앤토닌 스칼리아(레이건 임명), 클레어런스 토마스(아버지 부시 임명), 새무엘 얼리토 2세(아들 부시 임명), 그리고 앤소니 케네디(레이건 임명)였다.
케네디 대법관은 진보적 네 명과 보수적 네 명의 판사들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해온 사람으로 그가 어느 쪽을 지지하는가가 많은 사건의 결정적 순간을 제공해 왔었지만 건보법 판결에 있어서 케네디는 보수파에 애당초 동조한 반면 보수인 로버츠가 진보주의자들 넷과 합세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로버츠의 판결은 워싱턴 포스트 등 거의 모든 유력지들의 지지를 받았다. 만약 로버츠가 평소처럼 보수 성향 판사들 중에 들어 건보법의 핵심 조항을 위헌이라고 했다면 대법원에 대한 신뢰도가 크게 훼손되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이라고 지적되고 있다.
사실 로버츠가 대법원장이 아니고 판사 중 하나였다면 다른 결과가 나왔을 것이라는 추측마저 있다.
정치에 있어서 중립이어야 하는 전통과 위치를 확고해 해야 하는 대법원의 수장으로서 심사숙고 끝에 내린 현명한 결정이었다는 칭찬을 많이 듣고 있다.
대단히 실망한 공화당 쪽에서는 건보법을 취소하는 입법을 하겠다고 벼르고 있어 대선 이전이나 이후에도 진보 대 보수의 대결은 더욱 첨예화될 것으로 보인다.
로버츠는 오바마의 하버드 법대 선배이다. 그런데 로버츠가 상원 인준을 받을 때 당시 상원의원이던 오바마는 그가 대법원 판사 자격은 충분하되 보수적이라는 이유로 부표를 던진 역사가 있다.
지난 2009년 1월 오바마의 대통령 취임식에서 그에게 선서를 시킨 것은 당연히 로버츠 대법원장이었다. 그런데 불과 20여 자의 대통령 선서문을 로버츠가 보고 읽은 것이 아니라 기억에 의존했던 탓인지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처럼 머리 좋은 사람이 그 짧은 내용을 기억 못했을 리 없을 것이라고 추리해보면 별의별 가설에 사로잡힐 수 있다. 또 선서가 제대로 안되었으니 대통령 정통성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다. 어쨌건 이틀 후 로버츠는 백악관에 초치되어 이번에는 선서문을 읽어서 오바마가 복창하는 절차를 거쳤다.
한편 연방 대법관들은 전부 아이비리그 법대 출신이다. 여섯 명이 하버드, 두 명이 예일 출신이며 긴스버그는 하버드를 다니다가 컬럼비아에서 학위를 받았다. 법과대학이 그렇게 많건만 아이비리그 몇 대학에서만 대법관을 배출한다는 사실은 평등사회라는 미국에서도 사법부의 중추는 엘리트들이 독차지한다는 현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
<남선우/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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