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한국의 한 대형교회 원로목사가 자신의 교회세습을 공개적으로 뉘우쳐 적지 않은 반향을 일으켰다. 회개의 눈물을 흘린 목회자는 충현교회 설립자로 지난 1997년 자신의 아들에게 교회를 물려주어 ‘대형교회 세습 1호’의 기록을 남겼던 김창인 목사이다. 노목사는 “목회경험도 없고 기본 자질도 되어 있지 않은 아들을 무리하게 목사로 세운 것은 일생일대의 실수였다”며 뒤늦은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김 목사가 은행원으로 일하던 아들에게 뒤늦게 신학공부를 시켜 후계자로 세웠을 때 많은 비판이 뒤따랐다. 그러나 그는 이런 질책에 귀를 막은 채 교인 수 3만5,000명의 대형교회를 무리하게 아들에게 넘겼다.
이후 15년간의 세습사는 한마디로 비극이었다. 부자간의 갈등으로 교회는 분열과 반목을 거듭했으며 온갖 추문과 논란이 뒤따랐다.
충현교회를 기점으로 한국 대형교회들의 세습이 줄을 이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저지른 잘못은 결코 가볍다고 할 수 없다. 교회세습이 성경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을 기본적인 소양을 갖춘 목회자라면 모를 리 없다. 그런 가르침을 외면한 대가를 그는 혹독히 치렀다.
그런데도 한국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충현교회의 전례를 따라 단지 자신의 핏줄이라는 이유로 아들들에게 교회를 대물림하고 있다. 형제들이 모두 대형교회를 세워 ‘축복받은 목회자 가문’으로 부러움을 샀던 어떤 집안의 경우 같은 자 돌림의 사촌형제들이 줄줄이 아버지 교회를 물려받는 어처구니없는 일도 버젓이 벌어지고 있다. 교회 사유화의 가장 나쁜 사례가 바로 세습이다.
인간에게는 잠재적으로 세습에 대한 유혹이 있다. 핏줄에게 자신의 것을 그대로 넘겨주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다. 사회가 깨이기 전까지만 해도 세습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재산은 물론이고 지위와 권력까지 그대로 대물림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함께 세습은 점차 자취를 감췄다. 사적인 영역에서의 세습은 여전히 용인돼도 공적인 영역의 세습은 금기시 되고 있다. 아주 일부의 왕정국가와 엉터리 독재국가에서만 간혹 권력이 세습되고 있을 뿐이다. 또 기업처럼 사적인 영역이라고 해도 경영의 성패가 가져오는 사회적 여파가 만만치 않은 대기업들의 경우에는 세습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 영적인 영역의 교회가 어떠해야 할지는 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도 따가운 시선을 감수하면서까지 온갖 편법과 수단을 동원해 자식에게 자신이 누리는 모든 지위와 권력을 그대로 넘겨주려고 한다. 그릇의 크기와 능력은 제대로 헤아리지도 않은 채 말이다. ‘오마하의 현자’ 워런 버핏은 이런 유혹의 어리석음을 깊이 꿰뚫고 있는 것 같다. 그는 세습옹호론에 대해 “마치 내가 2000년 올림픽 국가대표 수영선수였으니까 아들도 2020년 올림픽 대표로 뽑아야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 얘기”라고 꼬집는다.
김창인 목사의 후회처럼 핏줄의 유혹 때문에 깜냥이 되지도 않는 자식에게 지위와 권력을 물려주는 것은 조직에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물려받은 당사자들에게도 크나 큰 비극이 된다. 작은 배에 너무 큰 돛을 달아주면 그 배는 기우뚱거리다 결국은 뒤집혀 버리게 된다.
북한의 3대 세습 코미디는 세계인들의 조롱거리가 됐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북한 세습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강경한 비판을 쏟아내 온 집단이 대형교회와 수구언론을 비롯한 한국의 세습세력들이라는 점이다. 세습이 이뤄지는 조직의 분위기는 대부분 전체주의적이다.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추종이 지배적이다. 이런 면에서 북한과 한국의 세습세력들은 상당히 닮아 있다.
우리는 내 자신의 도덕적 약점을 똑같이 갖고 있는 타인에 대해 자신도 모르게 적대감을 드러내곤 한다. 그 사람에게서 나의 감추고 싶은 모습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가령 타인의 외도에 대해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고 비판하는 사람은 같은 문제를 안고 있거나 최소한 그런 욕망을 억누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면 된다.
세습에 안달하는 대형교회 목사들이 왜 설교 강단에서 북한에 대해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퍼붓고 있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해도 위선적이라는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런 시선을 잠재우려면 세습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자신부터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남의 잘못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자기 눈의 들보부터 봐야 한다는 말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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