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념 덧칠하기가 지금 한국을 휩쓸고 있다. 보수진영은 정치권력과 언론권력을 총동원해 진보를 ‘빨갱이’와 ‘종북’으로 덧칠하는 일에 혈안이 되고 있다. 통합진보당 일부 세력의 일탈로 촉발된 종북논쟁으로 보수는 의도했던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 있다. 반복되는 주장에 대중은 결국 흔들리기 때문이다. 남과 북이 갈려 있는 상황에서 색깔론은 보수 세력이 전가의 보도처럼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카드가 돼 왔다.
색깔론이 한국의 특수상황에서 빚어지는 덧칠하기라면 좀 더 보편적인 형태의 덧칠하기로는 ‘복지 망국론’을 들 수 있다. 복지를 하면 나라의 재정이 거덜 나고 결국 나라를 망치게 된다는 논리는 보수우파가 18번처럼 입에 올리는 단골 레퍼터리다. 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그리스가 파산 상태에 이르자 보수논객들과 언론들은 “복지 좋아하더니 그렇게 될 줄 알았다”며 마치 복지 망국론이 증명이라도 된 듯 무차별 공격을 해댔다.
그러나 정말 복지가 망국에 이르는 길이라면 가장 먼저 흔들리고 망했어야 할 나라는 그리스 같은 잔챙이 국가들이 아니라 스웨덴을 비롯한 북구의 진정한 복지국가들이어야 했다. 하지만 이런 나라들은 경기침체도 아랑곳 않고 안정적인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스웨덴은 GDP의 30%를 복지에 쏟아 붓는다. 인접해 있는 노르웨이와 핀란드, 덴마크도 비슷하다. 선진국들의 모임이라는 OECD의 평균 복지예산 비율은 19%가 조금 넘는다. 복지가 소모적인 지출이고 국가 재정을 파탄 내는 주범이라면 스웨덴은 벌써 망했어야 하고 그리스는 건재해야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리스를 비롯해 현재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남유럽 국가들의 복지재정 비율은 유로존 국가들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이니 말이다.
이탈리아만이 유일하게 상위 5위 안에 포함돼 있지만 이탈리아의 근본문제는 과잉복지가 아니라 고질적인 정경유착이다. 이탈리아 복지 예산의 쓰임새를 면밀히 들여다보면 28%의 금액이 상위 20% 계층에 흘러들어간 것으로 드러난다. 복지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닌 부자들을 위해 잘못 쓰여 온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가 복지 때문에 망하게 됐다고 주장하는 것은 총제적 진실과 거리가 멀다. 다른 유럽국들과 비교할 때 알량한 수준의 복지예산을 써온 그리스 위기의 주범이 복지인양 모는 것은 복지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보수들의 전형적인 덧칠하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 위기를 초래한 것은 복지가 아니다.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인 그리스가 유럽연합이라는 거대체제와 단일통화로 묶이면서 생긴 환상과 무절제가 가져온 거품이 원인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그리스는 유럽연합에 묶여 옴짝달싹 못했다. 만약 그리스가 독자적인 통화를 사용하는 상황이었다면 그처럼 무기력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스웨덴이 입증하고 있듯이 든든한 복지시스템을 가진 나라는 위기에 면역력과 저항력이 강하다. 복지체력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경제 위기가 닥쳐도 별로 흔들리지 않는다. 많은 액수의 복지지출은 곧 내수와 일자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외부 시장상황이 어떻든 경제의 바퀴는 안정적으로 굴러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도 보수는 어떻게든 복지를 부정적으로 각인시키지 못해 안달이다. 4대강 사업을 강행해 국가 재정적자를 눈덩이처럼 불리면서도 MB정권은 초·중등학생들에 대한 무상급식은 ‘망국적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했다. 그러면서 한편에서는 부자감세를 추진했다.
한국의 복지예산 비중은 OECD 최하위인 멕시코에 이어 밑에서 두 번째인 9% 선이다. 미국은 13~14% 정도다. 우스운 것은 복지수준이 높지도 않은 이 두 나라에서 유독 복지 포퓰리즘이니 복지 망국론이니 하는 엉터리 담론들이 횡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복지가 잘 돼 있는 국가는 건강하다. 건강한 사람이어야 열심히 일을 하고 소득도 늘릴 수 있듯이 복지체력이 뛰어난 나라들은 경제 위기 속에서도 건실한 성장과 안정을 구가한다. ‘복지 망국론’이 아니라 ‘복지 강국론’이 훨씬 진실에 가깝다.
미국이 조속히 경제를 안정시키고 일류국가의 지위를 되찾고 싶다면 처방은 간단하다. 당장은 양적 완화 조치를 통해 돈을 풀고 중장기적으로는 복지를 확대해 나가는 것이다. 북구 수준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OECD 평균정도는 가능하다.
복지 덧칠하기가 위험한 것은 국민들을 호도해 잘못된 정치세력을 선택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담론의 논거라는 것이 원래 체리를 따듯 마음에 드는 케이스만 선별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지만 그리스라는 체리는 덜 익어도 너무 덜 익었다.
<조윤성 논설위원>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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