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수백만 관객을 모은 한국영화 ‘달마야 놀자’는 조폭과 불교라는 전혀 어울릴 법 하지 않은 소재를 적절히 버무려 흥행에 성공했다. 세력다툼에서 밀린 5명의 조폭 일당이 깊은 산속 암자로 숨어들면서 조폭들과 스님들 간에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을 벌이는 것이 영화의 내용이다. 오락영화를 표방하면서도 결론 부분에 가서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려는 작위성이 다소 거슬리긴 했지만 그런대로 봐 줄만했던 영화로 기억된다.
이 영화에서 조폭 스님들은 삼육구 게임에서 그리고 고스톱에 이르기까지 온갖 세속의 놀이들을 하면서 은둔의 지겨움을 달랜다. 이 장면들을 웃음을 유발하기 위한 장치 정도로 여겼는데 순진한 착각이었다. 현실에서는 영화 속보다 훨씬 더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최근 불거진 불교계의 추문은 보여주고 있다.
한 스님이 경쟁 스님들의 음주도박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시작된 추문은 양측의 폭로전으로 번지면서 불교계의 치부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 쏟아져 나오는 폭로 내용은 불자가 아닌 사람들이 보고 듣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종교는 글자 그대로 ‘으뜸의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어지러운 세상에 올바른 가르침이 되어야 할 종교가 오히려 어지러움의 근원이 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불교를 비롯한 한국 종교의 타락상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종교는 타락할 위험을 항상 안고 있다. 제대로 된 감시와 견제를 받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의 감시도 받지 않는 종교는 어김없이 권력이 된다. 절대적 권력이 절대적으로 부패하듯 권력화 된 종교도 같은 길을 간다. 한번 타락을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 최고가 타락하면 최악이 되는 법이다. 타락한 종교가 바로 그렇다.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나누는 기준은 ‘자기부인’(自己否認)의 가르침이 있는지 여부이다. 자기부인은 낮아짐과 비움이다. 욕심과 교만을 경계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인의 길을 간다는 것은 희생과 고통을 감수해야 함을 뜻한다. 그만큼 어려운 고난의 길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이런 점에서 가장 뛰어난 고등종교이다. 이승에서의 영달을 비는 기복적인 하등종교와 구분된다.
종교학자들은 고등종교의 타락이 시작되면 몇 가지 조짐들이 나타난다고 설명한다. 가장 먼저 나타나는 현상은 종교시설과 종교인들의 급증이다. 한국의 교회와 사찰 수는 놀라울 정도의 속도로 증가해 왔다. 교회는 7만개 내외를 헤아리고 사찰 역시 2만5,000여개에 달한다. 현재 분란이 일고 있는 불교의 경우 지난 1966년 사찰수가 2,000여곳이었으니 40년 사이에 10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교회와 사찰이 늘었다는 것은 목사와 승려들 또한 그만큼 많아졌다는 말이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한국인들의 신앙심이 한층 더 돈독해진 것으로 보기에는 지금의 한국사회가 너무 혼탁하다. 그보다는 속된 말로 ‘먹을 것이 있고 장사가 되니’ 교회와 사찰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고 종사자들이 몰리는 것이라 보는 게 더 타당하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고통의 길이라면 이렇듯 마구 생겨나고 몰려들지는 않을 것이다.
1980년대 한국이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고 급속히 도시화되면서 종교도 따라 급성장했다. 잘 살게 됐음에도 급속한 변화와 경쟁은 불안감을 안겨주었으며 사람들은 종교를 찾았다. 그런 필요와 수요에 맞춰 교회와 사찰은 늘어났다. 으뜸의 가르침을 전하기에는 행실이 너무 밑바닥인 목사와 승려가 양산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가르침에서도 자기부인의 메시지는 점차 사라지고 신자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한 기복적인 내용들이 대세가 됐다. 우월감을 감추지 않는 일부 종교의 가르침이란 것이 실상은 하등종교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세상과 영혼의 부패를 막아야 할 종교가 소금의 짠맛은 잃어버린 채 오히려 달콤한 설탕이 돼 사회와 영혼의 건강을 해치고 있다.
불교의 타락이 극에 달했던 시절 티벳의 남자들 가운데 70%가 승려였다. 기독교가 위기에 처했던 시기에도 예외 없이 교회와 성직자가 급증했다. 한국교회는 규모의 성장을 자랑하지만 이것은 그리 으쓱댈 일이 아니다. 불교계 역시 마찬가지다.
종교의 외형적 중흥은 오히려 그 속이 점차 썩어가고 있다는 위험신호일 가능성이 높다. 불교계의 이번 추문은 그것이 일부 곪아 터진 것이다. ‘성공한 종교인’으로 불리는 이는 어느 때보다도 넘쳐나지만 ‘참 종교인’은 갈수록 찾아보기 힘든 역설의 시대를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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