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가 덮쳤다. 거대한 물줄기가 집안으로 밀려들어온다. 그 순간 그는 가장 중요한 둘을 챙겼다. 하나는 다섯 살 난 딸이다. 또 다른 하나는 초상화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다.
급류에 휩쓸려 딸애의 손을 놓쳤다. 그러나 초상화는 계속 움켜쥐고 있었다. 강형권이라는 이 공장노동자의 스토리는 얼마 후 관영매체에 크게 보도됐다. 진정한 영웅이라는 찬사와 함께.
모택동의 초상화 앞에서 소원을 빌면 잘 성취된다고 한다. 중국의 일부지역에서 전해지는 미신이다. 모택동 숭배의 흔적이다. 그 모택동의 중국도, 스탈린의 소련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 광적인 개인숭배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할까. 그 북한 사회에서 전해진 이야기다.
북한주민의 삶 가운데 가장 중요한 품목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다. 북한의 공공기관은 말할 것도 없다. 집집마다 이 위대한 수령과 경애하는 지도자의 초상은 반드시 걸려야 한다. 그것도 집 안의 가장 한 가운데에. 그 초상화가 곧 셋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김일성에서 김정일, 그리고 김정은으로 수령독재 체제가 3대로 이어지면서.
태양도, 달도, 별도, 온 인류도 오직 수령을 위해 존재한다는 해괴한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북한. 거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컬트적인 개인숭배. 그 우상숭배의 이면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인간지옥도다. 정치범 수용소다.
그 수용 인구는 최소한 15만에서 20만으로 추산된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의 죄목도 모른다. 단지 기독교도라는 이유로, 수령님의 초상화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혹은 외국방송을 들었다는 이유로 수감돼 있다. 할아버지에서 손자에 이르기까지 3대가 수용돼 있는 경우도 하나 둘이 아니다. “종파주의자, 계급의 적은 3대의 씨를 말려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 때문이다.
그곳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상을 절하는 고통으로, 수용소는 지옥 그 자체다.
여섯 살 난 여자아이가 배가 고파 옥수수 다섯 알을 훔쳤다. 그 소녀는 간수에게 맞아 죽었다. 가족의 동태를 고발하도록 했다. 그 지시를 잘 따르지 않자 10여 세 된 소년의 배를 쇠꼬챙이에 꿰어 매달고 그 아래에 석탄불을 피웠다. 살이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 소년은 결국 가족을 고발했다.
탈북자들이 전하는 정치범 수용소의 일상이다. 고문에, 중노동에, 기아에, 죽음이 예사다. 여성수감자의 경우 고통은 더 가중된다. 간수들의 성노리개가 되기 일쑤다. 임신을 할 경우 강제낙태는 물론이고 영아살해가 뒤따른다.
인간에 대한 잔학행위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일까. 그 극단적 케이스가 신동혁씨 스토리다. 태어난 곳이 정치범 수용소 제14호 교화소다. 그의 출산부터가 비극적이다. 한 남성과 여성 수감자에게 표창이 내려졌다. 합방이 허락된 것이다. 그렇게 해서 그가 태어난 것이다.
그는 교화소에서 농장의 동물처럼 사육됐다. 그의 첫 인생 23년 동안 그에게 요구된 것은 간수에 대한 절대복종이었고 삶은 구타와 배고픔, 강제노동이 전부였다. 그는 14살 때 어머니와 형이 공개 처형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했다. 그러나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사랑이니, 감사함 따위는 전혀 모르는 동물로 사역되었기에.
그 정치범 수용소를 탈출한 지 7년이 되는 요즘 그는 새삼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인간의 감정이란 것을 조금씩 알아 가게 됐다. 그러면서 감정의 혼란 속에 빠져든 것이다. 게다가 육신적으로는 수용소를 탈출했으나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서다.
인간이 동물처럼 사육되어지는 참담한 북한 정치수용소의 현장이 고발됐다. 워싱턴포스트의 기자 브레인 하든이 그 장본인이다. ‘14호 수용소 탈출’이란 저서를 통해 ‘Never Again!’-유대인 학살을 이미 경험한 인권시대에 그런 인류에 대한 범죄가 어떻게 용인되는지 고발을 하고 나선 것이다.
‘Never Again!’- 보스턴 글로브지도 같은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그런데 한 가지 단어가 눈에 들어온다. ‘We’라는 단어다. 보도의 객관성을 흐릴 수 있다. 비판정신을 왜곡시킬 수 있다. 그래서 ‘We’ 메시지는 거의 사용하지 않는 게 미국 언론의 요즘이다.
그런데 왜 ‘We’ 메시지인가. 통렬한 자기반성이란 시각을 통해 북한인권참상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Never Again!’의 시대를 살아가는 동시대인으로 너나 할 것 없이 그 북한의 인권참상에 책임이 있다는 스스로의 성찰이다. ‘문명세계, 민주주의 체제에 살고 있는 우리의 무관심이 21세기 판 아우슈비츠를 가져오게 했다’는 지적이다.
이코노미스트지도 같은 입장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다루었다. 핵문제에만 눈이 가려, 통일비용을 겁내어 북한의 인권참상을 외면한 미국과 한국을 비판했다. 그리고 북한 주민의 고통을 타자(他者)적 입자에서만 다뤄왔던 스스로의 보도에도 비판을 가한 것이다.
북한의 인권개선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이 UCLA에서 열린다. 한국 정부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가 모처럼 주최하는 이번 심포지엄에 보다 많은 한인들이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인권은 이념을 뛰어넘는 인류보편의 가치다. 그리고 누구보다도 ‘우리 한인들의 무관심’이 북한인권 참상의 주원인이 됐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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