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는 여전히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수 십 년에 걸친 폭정체제에 맞서 아랍의 젊은이들이 일어선 것이다. 그 배후에서는 그러나 전혀 다른 성격의 전쟁이 전개되고 있다.”
‘아랍의 봄’에 전 세계의 이목이 쏠려있다. 그 ‘재스민 혁명’의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또 다른 전쟁, 기독교박해 상황을 한 현지의 목격자가 뉴스위크지를 통해 전한 내용이다.
아이러니도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자유화의 물결이 밀어닥쳤다. 민주주의의 희망으로 들떠 있다. 그 아랍-이슬람권에서 기독교 박해는 오히려 가중되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불탄다. 수류탄이 던져지고, 무차별 테러에 희생되는 인명이 수 천, 수 만 이다. 이라크에서, 이집트에서, 파키스탄에서 그리고 사하라 사막 이남 블랙 아프리카지역에 이르기까지 아랍-이슬람권에서 하루가 멀다고 벌어지는 일이다. 그 박해는 날로 폭력화되면서 인종청소의 기미마저 보이고 있다.
이는 그러면 아랍-이슬람권에만 국한된 현상인가. 퓨 포럼 보고서는 세계적 현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전 세계 197개 국가 중 70%에 이르는 131개 국가에서 기독교박해가 이루어지고 있다. 단지 기독교도란 이유만으로 살해되는 사람만 해마다 10만 여명에 이르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2억의 기독교인들이 매일 같이 온갖 박해에 시달리고 있다.”
퓨 포럼 보고서는 이 같은 통계 제시와 함께 한 가지 기이한 현상에 주목했다. 기독교박해 상황은 극히 과소평가돼 있고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 최대의 종교가 기독교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선진국들은 기독교권 국가들이다. 때문에 종교적 박해란 문제에서 기독교는 항상 가해자로 인식이 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정반대라는 것이 그 지적이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가져왔나. 무관심이 그 주 요인으로 지적된다. 세속주의가 대세다. 그러므로 공직자의 종교적 표현은 터부시된다. 그런 정황에서 서방국가 정부들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언론은 아예 무관심이다. 그 나태함과 무관심이 기독교박해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박해가 가장 심한 나라는 앞서 지적대로 아랍-이슬람권에 주로 몰려있다. 이란, 아프가니스탄, 사우디아라비아, 소말리아, 예멘, 이라크, 파키스탄 등이다. 그 지역에서 기독교는 물론이고 유대교 등 종교적 소수 커뮤니티는 머지않아 소멸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엑소더스 현상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수 백 세대를 거쳐 그 땅에 살면서 신앙을 지켜왔다. 그 원주민 기독교도들이 줄줄이 해외로 탈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라크의 기독교 인구는 절반으로 줄었다. 이집트의 경우 무바라크 정권 붕괴 후 해외로 빠져나간 콥틱 크리스천 수는 10만 여명에 이른다. 시리아의 기독교도들도 닥쳐오고 있는 박해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공산권 국가들도 여전히 기독교탄압국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다. 중국, 쿠바, 베트남 등이 바로 그 나라들이다. 이들 세속 정권하에서 기독교 박해는 그러나 소기의 목적과 상반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는 것으로 퓨 포럼 보고서는 밝히고 있다.
조직적이고 대대적인 박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교회는 오히려 더욱 강해지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그 전형적 케이스가 중국으로, 공산당의 집요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기독교 인구는 날로 증가, 전체 인구의 10%선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 되고 있다.
예외가 있다. 북한이다. 이슬람 국가가 아니다. 그러나 여간 집요하고, 또 잔인하게 박해를 가하는 것이 아니다. 올해에도 세계 최악의 기독교 탄압국가로 또 다시 등극했다. 벌써 10년째다.
평양은 한 때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불렸다. 동북아지역 기독교 중심지라면 중심지였다. 그 북한의 기독교도 숫자는 20여만, 많아서 40만으로 추산된다. 그나마 그 중의 상당수(7만 정도 추정)는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기독교 탄압에 있어 원리주의 이슬람국가들 마저 제치고 북한은 어떻게 그토록 오랜 세월 동안 ‘부동의 1위’를 차지하고 있을까. 북한은 주체사상을 종교화한 일종의 신정(神政)체제다. 북한의 극단적인 기독교 탄압의 배경에는 말하자면, 기독교를 이단시하며, 적으로 보는 일종의 사교(邪敎)적인 요소가 작용한 것이 아닐까.
또 다른 이유는 한국 사회의 무관심, 한국 교회의 침묵에 그 원인이 있다는 생각이다. 북한 인권에 그토록 무관심한 것이 한국 사회다. 그리고 종교와 정치는 별개라는 논리에 묶여 침묵만 지켜온 것이 한국의 교회였으니까.
또 다시 찾아온 고난주간이다. 무엇을 위해 기도해야 하나. 불현 듯 한 장면이 떠올려진다. “예수님, 왜 남한에만 계십네까. 여기에도 좀 오시라우요!” 북한 정치범 수용소의 실상을 파헤친 ‘뮤지컬 요덕’의 한 장면이다. 그 울부짖음이 새삼 귀를 때리는 것 같다.
종교적 이유로 박해받는 사람들, 특히 고통 받는 북한주민을 위해 기도하는 고난주간이 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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