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배우 메릴 스트립이 나이 40이 되었을 때 조각가인 남편과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 우린 뭘 해야 할까? 다 끝났잖아.”마흔 살 - 여배우로서는 환갑이 지난 나이, 할리웃에서 환갑 지난 여배우가 할 일은 ‘없다’는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비중 없는 변두리 역할이나 우스꽝스런 역할이라면 모를까 주연급 여배우다운 품격을 지키며 배우로 활동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트립이 마흔 살 되자마자 세군데서 영화 출연 제안이 들어왔는데 모두가 마귀할멈 역할이었다고 한다. 화려한 꽃들이 활짝 피었다가 스르르 스러지듯 여배우는 어떤 나이가 지나고 나면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할리웃이라는 무대의 생리이다.
그로부터 22년이 지난 지금, 진짜 환갑이 지난 62세의 스트립은 여전히 전성기다. 은퇴를 고민하던 마흔 이전까지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8번 지명되었다면 그 이후 그는 이번 ‘철의 여인’까지 포함해 9번 지명을 받았다. 남녀배우 통틀어 역대 최다 지명 기록이다.
‘기록’은 그 뿐이 아니다. 2008년 영화 ‘마마 미아!’는 전 세계에서 6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며 나이든 여배우도 흥행성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록’했고, 요리 전문가 줄리아 차일드(‘줄리 & 줄리아’ )든 80대의 치매
걸린 마가렛 대처(‘철의 여인’ )든 ‘환갑’ 여배우도 주인공 역할을 완벽하게 해낼 수 있다는 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는 또 한가지 기록을 추가했다. 패션잡지 보그 1월호에 커버 걸로 등장했다. 보그 역사상 최고령 커버 모델이다. 여배우에게 넘기 어려운 벽‘ 나이’를 그는 훌쩍훌쩍 잘도 뛰어넘고 있다. 마흔이면 은퇴이던 여배우의‘ 기대수명’을 50대, 60대로 계속 확장하고 있다.
장대 넘기 선수라도 된 듯 높은 나이의 장대를 유연하게 뛰어넘는 비결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다. 장대높이뛰기를 하려면 기본적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장
대의 높이를 인정할 것 그러나 주눅 들지 말 것. 나이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나이가 50, 60이라는 객관적 노화를 인정할 것, 그러나 주눅 들지 말 것“. 나이 60에 무슨 …” 이라며 지레 체념하는 것, 나이 60에 40처럼 보이려고 아등바등하는 것 -‘주눅’의 상반된 표현이다.
소설가 박완서 씨가 생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침마다 노인들이 떼를 지어 아파트 주위를 걷고 뛰는 것이 보기 싫다고 어느 글에서 썼다. 운동하
는 걸 탓하는 게 아니라 젊어지겠다고 기를 쓰는 모습이 보기 흉하다는 것이었다.
박완서나 박경리 같은 분들이 나이보다 젊어보겠다고 헬스클럽가서 땀을 뻘뻘 흘리고 성형수술 받고 하는 모습은 상상하기 어렵다. 노년이 되면서 시골로 내려가 텃밭 농사, 글 농사로 여생을 보낸 그들에게는 성형수술로 만들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었다. 늙음에 대한 편안함, 그래서 더욱 깊어진 정신세계가 경박하고 시끄러운 세상에서 흔치 않은 품격을 유지하게 했던 것 같다.
스트립의 승승장구도 이런 당당함이 한몫을 했을 것이다. 여배우에게 민감한 이슈인 노화와 관련해 그는 “늙는 것을 받아들이고 삶을 찬양하라”는 말을 해왔다. 나이 들고 나니 천편일률적 아름다운 주인공이 아니라 뭔가 색다른 흥미로운 역이 맡겨져서 좋다고도 했다.
스트립은 할리웃 여배우로는 드물게 성형수술을 반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자연스럽게 늙어가는 그의 외모를 섀론 스톤은 “정돈하지 않은 침대 같다”고 표
현한다. 흘러가버린 젊음에 연연하는 대신 나이 들며 얻어지는 것들, 내면의 성숙이나 지성미, 와인처럼 숙성된 연기력을 내세우는 것이 그의 성공비결로 보인다.
젊음과 외모가 중시되는 사회에서 늙음을 받아들기가 쉽지는 않다. 베이비붐 세대가 60대로 진입하면서 노화방지 상품시장이 급성장한 것이 좋은 예이다. 성장호르몬 요법, 성형수술, 줄기세포 미용성형 등 조금이라도 덜 늙으려고 쏟아 붓는 돈이 미국에서 연간 80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대부분 반짝 효과일 뿐 확실한 불로장생의 비법은 아직 없다고 한다.
“백발이 검은 머리만은 못하지만, 물을 들여야 할 이유는 없다. 오히려 온아한 데가 있어 좋다”는 자세가 현명하다. 97세로 타계한 피천득 선생이 수필‘ 송년’에서 쓴 구절이다. 같은 수필에서 그는 또 썼다.“ 지금 생각해보면 인생은 사십부터도 아니요 사십까지도 아니다. 어느 나이고 다 살만하다.”
메릴 스트립이 들었으면 백번 공감할 말이다. 지금 45살이면 가장 아름다운 45살로, 65살이면 가장 멋진 65살로 사는 것이 지혜이다. 나이와 더불어 편안
하지 않고 어떻게 긴 노년을 살아낼 수 있겠는가.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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