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의 대표적인 뉴스 매거진 프로그램 ‘60분’은 27일 정해진 거주지 없이 이곳저곳 떠돌며 생활하는 중부 플로리다의 세미놀 카운티 어린아이들의 처참한 실상을 보도했다. 지난 봄 이미 세미놀 카운티 어린이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알렸던 CBS는 또 한 차례 이곳을 찾아 후속보도를 내보낸 것이다.
첫 방송이 나간 후 곳곳에서 후원과 도움의 손길이 답지했지만 어린이들의 삶은 별반 나아지지 않은 듯 보였다. 여전히 많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옮겨 다니며 불안한 학교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학교 근처의 허름한 모텔들을 전전하기도 하고 부모가 모는 낡은 트럭 안에서 공부하고 잠을 자는 학생들도 많았다. 이 학생들은 주유소 화장실에서 세면과 양치질을 하고 등교한다.
이처럼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린 어린아이들이 세미놀 카운티에서만 올 한해 1,200명 늘었다. 이렇게 된 것은 물론 부모들이 경제적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실직을 하고 페이먼트를 하지 못해 집을 빼앗기면서 거리로 내몰리게 된 것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아이들은 특유의 낙천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15세 된 한 소녀는 “현재의 처지가 창피하지 않다. 인생은 그런 것이니까”라며 애써 미소를 보였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계속된다면 정신적인 트라우마는 피하기 힘들다. 어른들의 잘못으로 죄 없는 수많은 아이들이 고통 받고 있는 것이 지금의 미국 현실이다.
중산층은 오랫동안 미국을 상징하던 단어였다. 어느 나라보다도 두꺼운 중산층을 기반으로 미국은 경제적 성장과 정치적 안정을 누려왔다. 그러나 이제는 옛말이 되고 있다. 지구 온난화로 북극 얼음이 녹아내리듯 중산층은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인구조사 결과들은 이것을 뒷받침 한다. 빈민층은 사상 최대로 늘어났으며 과거 중산층 지역으로 분류되던 곳에 거주하는 미국인은 큰 폭으로 줄었다.
아이들과 함께 풍찬노숙하는 세미놀 카운티의 부모들은 천성적으로 게으르거나 무능한 사람들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왔지만 자신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극한 상황으로 내몰린 것이다. 이들의 존재는 풍요로움을 자부해 온 미국에게 불편한 진실이 아닐 수 없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다음 세대는 지금보다 나을 것이라는 믿음을 상징하는 ‘아메리칸 드림’도 점차 허망한 구호가 돼가고 있다.
불편한 실상의 원인은 날로 심화되고 있는 소득불균형에 있다. 지난 20~30년 동안 중산층 의 실질소득은 줄곧 내리막인데 반해 부유층은 새롭게 생성된 부의 대부분을 챙겨갔다. 그러다 보니 중산층이 자연히 줄어들고 “미국에는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만 있다”는 자조가 생겨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옥스포드 영어사전이 ‘올해의 단어’로 ‘짓눌린 중산층’(squeezed middle)을 선정한 것은 시의적절하다.
소득의 균형 상태를 나타내는 경제용어에 지니계수라는 것이 있다. 0은 완전 평등을, 100은 완전 불평등을 의미하는데 미국의 현재 43.2로 불평등이 대단히 심각하다. 아프리카의 르완다와 비슷한 수준이다. 선진국들 가운데 지니계수가 미국과 비슷한 곳은 단 한 나라도 없다.
불평등은 현재 미국이 앓고 있는 매우 심각한 질병이다. 이러한 미국병은 잘못된 정치가 초래했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미국사회가 브레이크 없이 질주해 오도록 방조하고 부추긴 정치세력들이 미국병의 주범이다.
중산층이 취약하면 사회의 갈등을 흡수해 주는 완충지대가 없어진다. 그래서 사회적 불안이 높아진다. 미국사회 곳곳에서 표출되고 있는 좌절과 분노, 그리고 대립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이처럼 사회가 크게 흔들리고 있고 그동안 몇 번의 위기를 겪었음에도 각성은 여전히 미약하다. 자신들의 이념을 몰아붙이려는 교언과 왜곡만이 판치고 있을 뿐이다.
마가렛 대처의 등장을 가져온 ‘영국병’은 강성 노조라는, 진보의 기운이 너무 승해서 생긴 질병이었다. 반면 명분 없는 전쟁으로 미국의 곳간을 거덜나게 하고 부자들에게 경제적 실과의 대부분을 안겨준 결과 초래된 ‘미국병’은 극단적 보수의 기운이 강해 생긴 질병이다. 잃었던 건강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잘못된 기운을 잘 다스려야 한다. 조속히 손쓰지 않을 경우 미국병은 고치기 힘든 만성질환으로 고착될 가능성이 크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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