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기 이탈리아 작가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은 단테의 ‘신곡(神曲)’과 대칭을 이루는 ‘인곡(人曲)’으로 불린다. 신의 심오한 섭리를 묘사한 신곡과 달리 인곡은 사람(특히 여자)의 음란한 색정을 다룬 100편의 짤막짤막한 이야기로 돼 있다. 현대소설의 문을 연 기념비적 문학작품이라는 평판을 듣지만 포르노의 고전이라는 비아냥도 듣는다.
고교시절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를 설명하던 역사 선생님으로부터 데카메론 얘기를 처음 들었다. 한 수녀원에 젊은 몸짱 농부가 벙어리 행세를 하며 머슴으로 취직한다. 얼마 안가서 9명의 수녀가 돌아가며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하게 됐고 나중엔 원장까지 합세했다. 벙어리는 비밀을 누설할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
10명의 여자들에 매일 밤 학대당한(?) 농부는 견디다 못해 입을 열고 “하나님의 기적으로 말을 할 수 있게 됐다”며 떠벌인다. 기절초풍한 원장과 수녀들은 없던 일로 해달라며 농부를 후대해서 내보낸다. 역사 선생님은 그 얘기로 인기짱이 됐고 사춘기 학생들은 역사시간마다 데카메론 얘기를 더 해달라고 졸라댔다.
데카메론이 나온 후 700여년이 지난 요즘 한국에선 위의 벙어리 머슴과 정반대 상황을 그린 영화가 엄청난 화제를 모으며 상영 중이다. 데카메론을 읽는 사람들이 입가에 웃음을 떠올리는 것과 달리 이 영화를 관람한 사람들은 심한 분노와 공분을 터뜨린다고 한다. 여류작가 공지영이 2년 전 출간한 동명소설을 황동혁 감독이 영화화한 ‘도가니’이다.
청각장애자(벙어리)를 위한 기숙학교인 광주 인화학교에서 교장과 그 동생인 행정실장 등 교직원들이 수년에 걸쳐 말 못하는 소녀들을 상습적으로 성폭행했다. 이들에게 강간당한 아이들 중엔 13살짜리도 있었다. 아이들은 데카메론의 머슴과 달리 진짜로 말을 못 할 뿐 더러 섣불리 발설했다가 기숙사에서 쫓겨나면 달리 갈만한 곳이 없는 처지였다.
이들 장애아의 비애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학부모와 의로운 교사, 그리고 이들과 의기투합한 목사 등 3명의 끈질긴 노력으로 인면수심의 교직원 6명이 법정에 섰다. 그러나 주범이랄 수 있는 교장(2009년 사망)이 항소심에서 집행유예 선고를 받는 등 어처구니없는 솜방망이 판결이 내려졌다. 사건에 연루된 교사 한명은 그 후 복직까지 됐다.
이 사건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하다가 영화화되고서야 대단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요즘 한국 신문은 온통 ‘도가니 탕’이다. 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물렁한 응징에 비난여론이 폭발하자 경찰청이 추가수사에 직접 나섰고 여당인 한나라당과 야당인 민주당이 성폭행 범죄의 경우 친고제를 폐지하고 공소시효도 적용하지 않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서두르고 있다.
한국의 ‘도가니 바람’과 달리 미국 각 도시에선 한국여인들의 ‘원정 성매매’ 바람이 문제되고 있다. 특히 한-미 비자면제협정이 발효돼 미국방문이 쉬워진 지난 3~4년간 뉴욕, 버지니아 등 미국 동부지역의 불법 마사지업소 등에서 성매매 행각을 벌인 한국여성 200여명이 체포됐다. LA에서도 한국여성 4명이 같은 혐의로 구속돼 교도소에 갇혀 있다.
한인 여성들이 매음굴로 둔갑시킨 마사지나 스파 업소는 미국 전역에 가히 무소부재다. 뉴멕시코 주 라스 크루세스, 미시시피 주 해티스버그, 코네티컷 주 스탬포드 등 생소한 도시에서도 최근 한국여성들이 성매매 혐의로 붙잡혔다. 샌프란시스코의 한 성매매 사이트에는 국적을 ‘한국’으로 표기한 매춘여성이 30여명에 달한다. 지난 9월8일엔 시카고에 원정 간 LA지역 한인여성 4명이 현지 마사지업소에서 매춘 및 성매매를 알선한 혐의로 체포됐다.
비자협정이 발효되기 전 워싱턴 주-캐나다 국경은 원정 성매매를 노리는 한국여성들의 단골 밀입국 루트였다. 벨링햄 북쪽 블레인 국경검문소나 동북부 오캐노간 산간 도로를 몰래 넘어 들어온 뒤 LA, 샌프란시스코, 뉴욕 등 대도시의 매춘알선 업소로 흩어졌다.
엊그제 한 친지로부터 쇼킹한 말을 들었다. 한인들이 즐겨 찾는 시애틀 일원의 골프장에 서울에서 온 ‘꽃뱀’들이 활보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골프를 안치는 나는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 없지만, ‘도가니 세태’를 감안할 때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얘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윤여춘 / 시애틀 지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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