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한 문화전쟁은 이미 시작됐다. ‘아메리카의 유럽화’를 제창하는 세력과 ‘아메리카의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세력 간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현재의 전황은 그런데 아무래도 유럽화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다.”
오바마 행정부 출범 직후 새로운 정권주도세력은 ‘개혁’이라는 이름 하에 국내외 어젠다를 모두 바꾸려 들었다. 헬스케어개혁에서 환경규제에 이르기까지. 그 때 워싱턴포스트의 찰스 크라우트해머가 내린 진단이었다.
그리고 3년여가 지났다. 유럽이 무너져 내리고 있다. 정치권이 지도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다. 시스템 자체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식지 않는 것이 있다. 유럽에 끌리는 마음이다. 유럽화의 꿈을 오바마 행정부는 여전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전쟁은 그래서 계속 소리 없이 전개되고 있다. 그 와중에 ‘미국적 예외주의’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 내리고 있다. 미국의 인구 증가율이 둔화되면서 어딘가 점차 유럽을 닮아 가고 있는 것이다.
얼마 전 싱가폴에서 한 인구문제 국제회의가 열렸다. 독일 녹색당 소속인 프라이부르크 시장이 발제연설을 했다. 한 질문이 던져졌다. 30년 후 독일의 미래에 대한 질문이었다. 그 프라이부르크 시장은 이렇게 대답했다. “미래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농담이 아니다. 과장의 언사는 더더욱 아니다. 진실을 말한 것이다.
지난 수십년 간 유럽은 전 세계에서 가장 낮은 출산율을 보여 왔다. 그 결과 현재 7억3000여 만에 이르는 유럽 인구는 2050년께에는 1억 가까이 줄 것으로 전망된다. 바로 뒤따르는 예상은 심각한 경제적 파국을 맞게 된다는 것이다.
그 징후가 벌써 나타나고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 지중해연안의 유럽 국가들이 파산직전의 상황에 몰려 있다. 이 나라들은 전 세계에서 가장 급격히 고령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들이다. 그 결과 노동 인력은 날로 줄고 있다. 반면 복지부담은 높아만 간다. 그 불균형 상황에서 경제시스템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이다.
독일은 유럽 내에서 초(超)경제 대국이다. 그 독일마저 인구문제에 관한 한 곧 ‘겨울나라’가 될 운명이다. 2030년께 근로자 100명당 은퇴자는 53명에 이를 전망이다. 무엇을 말하나. 독일도 거대한 부채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는 유럽만의 현상이 아니다. 한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 국가에서도 비슷한 시나리오가 펼쳐지고 있다.
예외 지역이 있다. 아니 예외지역이 ‘있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미국이다. 미국의 출산율은 인구 대체율을 훨씬 상회했다. 그러니 고령화 현상은 강 건너 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 미국적 예외주의를 위협하는 징후들이 하나 둘 포착되고 있다.
이민인구의 감소가 그 뚜렷한 징후다. 미국 내 불법이민자 수는 2007년 이후 100여 만이 줄었다. 합법이민자 수도 줄고 있다. 거기다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는 이민자 수도 격감 추세다. 2008년 100만의 이민자들이 시민권을 획득한 반면 2010년에는 60만으로 줄었다. 무려 40%의 감소율을 보인 것이다.
이 추세가 계속될 때 어떤 결과가 올까. 노동인구 격감에 전반적인 출산율 감소다. 1990년 이후 이민자들은 전체 노동력 증가분의 45%를 차지해왔다. 그리고 전 미국의 근로인구 중 이민자가 차지한 비율은 15.7%에 이르렀다. 이민자와 그 자녀들로 해서 미국은 유럽, 동아시아와 달리 높은 인구증가율을 보여 왔던 것이다.
왜 이민자 수가 줄고 있나. 멕시코, 중국, 인도 등 많은 이민자들을 배출한 나라에서 인구증가율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경우 1970년대 출산율은 가임여성 1명당 6.8명을 기록했다. 그것이 2011년에는 2명으로 떨어졌다.
경제발전이 또 다른 이유다. 멕시코의 국내총생산은 지난 10년 동안 45%가 증가했다. 아시아지역의 경우 경제발전은 더욱 눈부시다. 과거 같으면 오직 미국만을 살길로 생각했던 이들의 생각이 바뀌게 된 것이다.
좀처럼 가실 줄 모르는 경제 불황이 미국적 예외주의를 위협하는 또 다른 심각한 징후로 지적된다.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다. 장래가 불안하기만 하다. 그래서 결혼을 늦춘다. 결혼을 해도 아이를 낳지 않는다. 미국의 출산율은 한 세기만에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출산율이 떨어지고 인구가 줄어든다. 그 뒤로 찾아드는 것은 한 국가사회의 몰락이다. 고대 그리스가, 또 로마제국이 그랬다. 르네상스시대의 이탈리아가, 또 근대의 네덜란드가 그 같은 운명을 맞았었다.
‘출산율 저하의 유럽을 닮아가는 미국’- 이는 영적 차원의 위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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