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금융자본주의와 날로 왜곡돼 가는 경제구조에 항의하기 위한 월스트릿 점거 시위가 들불처럼 번져가고 있다. 3주 전 수십명의 보통사람들이 참가한 자발적인 집회로 시작된 시위는 규모가 급속히 커지면서 다른 대도시들로 확산되고 있으며 이제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들로까지 옮겨 붙을 기세다.
시위 참가자들은 하나의 범주로 묶을 수 없을 만큼 구성이 다양하다. 이념과 인종이 다르고 연령과 종교도 같지 않다. 다만 부의 불평등을 심화시켜 온 상위 1%의 탐욕과 부패에 대한 인내가 한계에 달한 사람들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을 뿐이다.
시위장을 휘감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분노의 감정이다. 염치를 저버린 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기 잇속 챙기기에만 급급한 금융 자본가들, 그리고 이들이 초래한 해악을 보면서도 방관만 하고 있는 정치권에 대한 절망감의 표현이다. 시위자들은 분기탱천하여 “더 이상 참고만 있을 수 없다”고 외쳐대고 있다.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분노는 표현하지 말아야 할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인식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다. 특히 한국 사람들은 희로애락의 기본 정서 가운데 특히 분노를 표현하지 않고 억압하는 것을 미덕으로 여겨왔다.
하지만 분노는 불평등과 불합리, 그리고 모순을 볼 때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감정이다. 따라서 이것을 무조건 억누르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분노를 억누르게 되면 그것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쌓여 나중에 더 큰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화는 이런 억압에서 비롯되는 마음의 병이다. 그래서 이것을 건강하게 풀어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사회적 분노를 다루는 바람직한 방식은 개인적 분노와 똑같다. 분노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사회는 그만큼 건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지금 미국인들이 자발적 시위를 통해서 표출하고 있는 분노는 바로 이런 범주에 속한다.
시위는 사회 구성원들이 분노를 배출하는 가장 기본적인 수단이다. 시민들의 시위에 열려 있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다. 분노의 표출을 억압할 경우 더 심각한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자 교훈이다. 분노의 배출구가 막힌 채 억압이 지속되면 그것은 파국으로 직결된다. 수많은 독재의 종말이 이것을 증언하고 있다.
만약 월스트릿 점거 시위와 같은 자발적 시민집회가 한국에서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극우세력은 수구 언론들을 등에 업고 색깔론과 음모론으로 덧칠하기에 혈안이 됐을 것이다. 질서를 앞세우기 좋아하는 보수는 정당한 의사표시와 분노의 표출까지 불순한 행위로 만드는데 탁월한 솜씨를 발휘해 왔다.
분노는 사회를 바꾸는 힘이 된다. 분노는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다. 마하트마 간디는 생애를 통틀어 가장 창조적인 경험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남아공화국 므리츠버그에서 경험한 분노였다”고 대답한 적이 있다. 인종차별의 생생한 현장을 보면서 한 젊은 변호사가 느꼈던 개인적 분노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꾸어 놓았다.
예수도 때때로 분노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분노에 관한 언급이 400회 이상 나온다. 이처럼 분노는 공의를 세우는 추동력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분노할 줄 모르는 사회에는 희망이 없다.
프랑스 레지스탕스 운동을 이끌었던 지식인으로 지금까지 생존해 양심의 목소리를 내고 있는 스테판 에셀은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기를 결코 단념치 않는 사람이어야 자신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고, 자신이 서 있는 곳을 지킬 수 있으며 자신의 행복을 지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에게 분노는 존재론적인 감정이다. 살아있기에 분노하고 분노하기에 살아있는 것이다. 그가 무관심과 냉소주의를 온갖 사회적 해악의 주범들보다 더 나쁜 것으로 본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무관심과 냉소주의야말로 저질 정치인들이 가장 바라는 국민들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인들은 오랫동안 그런 모습을 보여 왔다. 그러나 월스트릿 점거 시위는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무기력감에 젖어 있던 많은 미국인들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이번 시위가 정치적으로 어떤 의미 있는 성과를 거둘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하겠지만 미국사회가 아직은 건강하며 희망이 있다는 증거로 보기에 부족하지 않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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