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 한국 출판계를 뜨겁게 달군 뉴스는 서울대 김난도 교수의 에세이집 ‘아프니까 청춘이다’가 밀리언셀러에 오른 일이다. 에세이집이 100만부 이상 팔린 것은 법정 스님의 ‘무소유’를 제외하곤 2000년대 들어 처음이다.
청춘의 고민을 어루만져 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의 돌풍을 놓고 출판계의 해석은 분분하다. 답답하고 암담한 현실에 처해 있는 세대가 급격히 늘었으며 이들이 안고 가야 할 불안과 고민의 무게 역시 그만큼 무거워진 현실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회학적 분석에서부터 저자의 감성어린 필치에 이르기까지 제시되는 요인들은 다양하다. “깊은 성찰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하지만 이 책은 젊은이들의 열화 같은 호응을 얻으며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그 힘의 원천은 저자가 보여준 공감에 있다. 김 교수는 “뻔한 내용이라도 책상머리에 앉아 손끝으로 쓰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그는 청춘들의 이야기를 들으려 했으며 이들에게 훈계가 아닌 위로를 건넸다. 이것이 공감의 자세이다. 사람들은 보통 옳은 말 하는 이보다 자신을 이해해 주는 이를 더 좋아한다. 훌륭한 교사, 존경받는 리더, 그리고 따르고 싶은 부모들은 대개 이런 공감 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이다.
또 사회적인 관계는 수직적인 것에서 점차 수평적으로 바뀌어 가고 있다. 그래서 21세기를 흔히들 ‘공감의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최근 코넬대 경영대학원이 향후 수년간 비즈니스 리더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으로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을 꼽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공감능력이 정말 요구되는 것은 정치판이다. 그런데도 정작 정치판은 가장 공감능력이 떨어지는 인물들로 채워져 있다. 부자들과 권력자들은 공감능력이 가장 떨어지는 계층이다. 추론이 아니라 과학적인 조사를 통해 입증된 사실이다. 이들은 기본적인 생존을 위해 다른 이들의 감정을 살필 필요가 별로 없는 위치에 올라 있는 경우가 많다. 괜히 ‘딴나라당’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다.
정치인들은 말로는 유권자들을 하늘처럼 받들겠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군림하려 든다. 유권자를 받드는 척 낮은 자세를 취하곤 하지만 대개는 권력을 얻기 위한 처세일 뿐이다. 막상 권력을 쥐고 나면 변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공식이 점차 허물어지는 조짐이 보인다. 유권자들이 공감능력을 정치인의 필수적인 덕목으로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2008년 민주당 지지자들을 대상으로 자당의 대통령 후보에게 가장 중요한 자질이 무엇이냐고 묻는 설문조사가 실시됐다. 이 조사에서 ‘당선 가능성’을 꼽은 응답자보다 ‘공감능력’을 꼽은 사람이 더 많았다.
정치학자들은 별로 눈여겨보지 않았지만 이는 대단히 획기적이고 의미 있는 결과였다. 공감하지 못하는 정치인들은 점차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기 힘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정치신인 오마바의 당선은 이런 기류의 덕이 컸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할지를 놓고 지난 닷새 동안 정치권을 달궜던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 결국 이번 선거에는 나서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정치참여를 공식 선언하지 않았음에도 안철수 원장은 신드롬이라 할 정도로 돌풍을 일으켰다. 이런 돌풍의 근저에도 안철수라는 인물이 보여 온 공감능력에 대한 대중의 호감이 자리하고 있다.
안철수는 성공한 엘리트이다, 그의 이름 석자를 모르는 대한민국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다른 엘리트들처럼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 골몰하지 않고 그는 저술과 강연,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희망공감 청춘콘서트’ 등을 통해 대중과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에 힘을 써 왔다. 그런 그가 현실정치에 몸을 담을지 모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새로운 정치의 등장을 갈구하는 대중의 잠재된 욕구가 조금은 성급하게, 하지만 폭발적으로 분출된 것이 ‘안철수 돌풍’의 본질이다.
정치는 이제 연설의 시대를 지나 공감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현재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문화현상과 정치현상은 이것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대중과 공감하지 못하고 소통에 실패하는 정치인과 정치세력은 설자리를 점차 잃어 갈 것이다. 그런 만큼 내년도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갈지 낡은 패러다임으로 섣불리 예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권력이란 것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쟁취해야 할 목표물이 아니라 진정으로 공감하고 소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선물이 될 수도 있음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안철수 돌풍’의 의미는 적지 않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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