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희 논설위원
나이가 들수록 들리느니 안타까운 소식들이다.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거나 암과 힘겨운 투쟁을 한다거나 혹은 세상을 떠났다는, ‘생로병사’ 중 ‘병사’에 해당하는 소식들이 계속 들려온다. 특히 최근에는 친구 두 명이 각각 암으로 동생을 잃어 가슴이 아팠다. 아쉬움이 많은 젊은 죽음들이었다.
그리고 며칠 전 IT업계의 전설, 스티브 잡스가 현직에서 물러났다. 지난 몇 년 췌장암 수술, 간이식 수술 등으로 고치고 치료하며 다독여 온 몸이 더 이상 업무를 수행해내기 어려운 지경에 도달한 모양이다. 2000년 애플 CEO로 취임할 당시부터 최근까지 일련의 사진들을 보면 창의적 에너지 넘치던 퉁퉁하고 넓적했던 그의 얼굴은 이제 도를 닦는 승려처럼 말갛게 야위었다. 50대 중반, 한창 나이에 그의 앞을 가로막는 질병이라는 벽 앞에서 그는 지금 어떤 심경일까.
사람의 삶의 모습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벽’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인생이나 한두번 ‘벽’이 없을 수 없고, 그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진다. 실패나 상실 등 살아갈 용기를 꺾어 버리는 고통스런 경험들이 앞을 가로 막을 때 우리는 두 부류로 나뉜다. 그대로 허물어지는 그룹과 기어이 벽을 뛰어넘는 그룹이다. 전자는 ‘~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서 실패의 삶에 머무는 반면 후자는 ‘~했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향을 틀어 성공적 삶을 일궈낸다.
잡스는 거기서 한 단계를 더 올라간다. ‘~라는 벽에도 불구하고’ 가 아니라 ‘~라는 벽이 없었던들’이라며 인생의 악조건을 성공의 기반으로 바꾸었다. 그의 인생에서 중요한 ‘벽’, 그대로 주저앉을 수도 있었던 사건은 대학 자퇴와 애플에서의 해고이다.
잡스는 양부모 밑에서 자랐다. 대학원생 미혼모에게서 태어나 입양되었다. 생모는 대학교육을 중시해서 아기를 반드시 대학에 보낸다는 조건으로 입양을 허락했다.
약속대로 17년 후 잡스는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 사립대학의 학비가 엄청났다. 근로계층인 양부모가 평생 모은 돈을 몇년 학비로 다 날릴 판이었다. 그렇게까지 해서 대학에 나닐 의미를 찾지 못한 그는 6개월 후 자퇴했다. 그리고는 1년 반 동안 이 과목 저 과목 듣고 싶은 강의들을 도강했다. 그때 수강한 과목 중의 하나가 컬리그래피, 서양식 서예였다.
그리고는 잊어버렸던 서체 공부는 10년 후 매킨토시를 디자인할 때 제대로 활용되었다. “내가 대학을 자퇴하지 않았던들, 서체를 공부했을 리가 없고 그랬다면 PC에 지금 같은 다양한 활자체가 들어가지 못했을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그가 대학을 자퇴하지 않았던들, 20살 때 부모 집 차고에서 애플이라는 회사를 차렸을 리도 없었을 것이다.
친구와 둘이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 직원 4,000명의 대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고용한 전문 경영인에 의해 해고당했다. 자신이 창업하고 밤잠 안자고 키운 회사로부터 맨몸으로 쫓겨났으니 그 배신감, 좌절감, 분노가 얼마나 컸을까.
너무 괴로워서 몇 달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더라고 했다. 그의 인생의 두 번째 ‘벽’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뭔가가 스멀스멀 깨달아지더라는 것이다. 그 뼈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일 자체는 여전히 재미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다시 시작한 것이 넥스트와 픽사였고, 거기서 성공한 것이 애플 복귀로 이어졌다.
그는 “애플에서 해고됐던 것이 내 생애 최고의 사건”이라고 회고하곤 한다. 나이 서른에 어마어마한 성공의 무게에 짓눌려 주저앉을 뻔 했었는데 ‘운 좋게도’ 쫓겨난 덕분에 초심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할 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인생의 크고 작은 ‘벽’ 앞에서 계속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일에 대한 열정이었다고 그는 고백한다. 일이 너무 좋아서 온 신경이 그리로만 가고 끝없이 파고들게 되니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단순히 잘 하는 수준을 넘어 비범한 경지에 오르는 비결은 그 일을 사랑하는 것,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그러니 남들 눈치, 남들 가치에 흔들리지 말고 정말로 좋아하는 일을 찾으라고 젊은이들에게 충고한다.
지금 그의 앞에 놓인 제3의 ‘벽’, 질병은 아마도 가장 힘겨운 벽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 앞에서 잡스는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그래서 10년쯤 후 “그때 병고가 없었던 들~”이라며 뭔가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자극을 줄 수 있을까. 좌절하지 않는 위대한 영혼은 우리 삶에 늘 좋은 자극제가 된다. 잡스가 그 일을 한번 더 해냈으면 한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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