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영(주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虎死留皮 人死留名)”는 고사성어가 있다. 중국 양나라 장수 왕언장이 진나라와의 두 차례 전투에서 모두 패한 후 결국 포로로 잡혔다. 진나라 왕이 그의 용맹성을 높이 사서 귀순할 것으로 종용했으나 왕언장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왕언장의 몸은 즉각 두 동강이 났지만 그의 고매한 인생관은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해 내려오고 있다. 사람이 추구해야할 가치는 부귀영화가 아닌 명예라는 것이다.
누구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유명 관광지의 벤치, 안내판, 돌기둥 등에는 방문객들이 남긴 이름으로 빤할 틈이 없다. 그러나 자기 손으로 새겨놓는 이름은 가치는커녕 별 의미가 없는 낙서로만 취급될 뿐이다. 히틀러나 오사마 빈 라덴이 남긴 오명과 무엇이 다르랴. 슈바이처, 테레사처럼 역사에 길이 남을 이름을 남기지는 못할망정 단 한번 뿐인 삶을 마감하고 나면 뭔가 긍정적인 흔적은 남겨야 할 것 같다.
최근 한국에서 “당신은 죽어서 무엇을 남기겠느냐”고 묻는 설문조사가 있었다. 전체 응답자중 20%가 “소유하고 있는 재산을 남기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또 10%는 “인생은 ‘공수래공수거’이므로 아무 것도 남길 필요가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총 응답자의 절반은 “나도 이름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고 한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세월은 붙잡지 않아도 쉬지 않고 달려간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어떤 형태로든 흘러가게 마련이다. 100년도 안 되는 삶을 어물쩍 산 뒤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흙으로 돌아간다면 너무나 허무하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영국의 유명한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살만큼 오래 살다보면 이런 일은 일어나게 마련(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버나드 쇼처럼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도 죽음에 대한 허탈감이 있었던 모양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게 되어 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삶에 열심히 도전하여 이름을 역사에 남긴 인물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왔다. 삶은 실패했다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은 세인의 가슴에 두고두고 남게 된다.
꼬마 때 ‘벤(Ben)’이라는 노래를 불러 스타덤에 오른 후 약물과용으로 50대에 요절한 마이클 잭슨은 미국 팝음악계의 흐름을 완전히 바꿔놓은 세기적 가수로 평가된다. 그가 생전에 입었던 빨간 재킷이 최근 19억4000만원에 상당하는 가격으로 경매돼 화제가 되었다. 요즘 ‘시한부 인생’설이 돌고 있는 스티브 잡스도 좋은 예이다. 트위터, 페이스 북, 소셜네트워킹 등 인터넷 혁명을 가능케 한 거물 잡스는 ‘가방 끈은 짧지만’ 세상에 끼친 엄청난 영향력으로 사후에도 세상 사람들의 입에 회자되며 그 이름이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이름을 남기는 사람들이 누구인가. 그들은 자신의 이권보다는 대중의 이익과 편의를 위해서 자신의 몸을 아끼지 않고 희생하는 사람들이다. 사회를 위해서, 뭇 사람들을 위해서 살신성인 정신으로 세상을 움직이고 변화시키며 살아가는 위인이자 영웅들이다 한국에도 요즘 희생적인 삶을 살다 간 고 이태석 신부같은 위대한 인물들을 재조명하며 그들이 남기고 간 공적을 돌아보는 행사를 갖는 등 이들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고조되고 있다. 이는 우리도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이들의 따스한 손길과 온정, 희생정신을 통한 나눔과
봉사정신은 사회를 아름답게 만들고 세상을 따스하게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처럼 영웅이나 위인의 반열에 서지는 못 하더라도 최소한 ‘나’ 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살고 갔다는 족적만큼은 바르게 남기고 가야 하지 않을까.
아름다운 이름인가, 추한 이름인가? 기왕이면 내 이름이 사후에도 아름답게 남아 두고두고 향기가 피어난다면 이보다 더 명예로운 삶은 없을 것이다. 나는 어떤 이름으로 무엇을 남길 것인가? 무더위로 잠 못 이루는 밤에 곰곰이 생각해봄 직 하다. juyoung@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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