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명품전문 잡지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영화에서는 젊은 친구들이 술집에 둘러 앉아 명품의 가치를 놓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나온다. 이 논쟁을 깔끔하게 마무리한 것은 “명품은 유틸리티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이덴티티를 뜻한다”는 대사이다.
쓰임새가 아니라 가지고 다니는 사람의 신분을 드러내는 것이 명품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다. 이 한마디에는 명품의 본질이 더 할 수 없이 잘 함축돼 있다.
전통적인 신분제도가 무너지면서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은 점점 더 사라지고 있다. 또 익명성 때문에 누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도 점차 힘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과 다르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일반적인 욕구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브르디외는 이것을 ‘구별 짓기’라고 불렀다.
브르디외가 ‘구별 짓기’를 말했을 때 그것은 주로 문화적 취향을 뜻했다. 고급스런 사교활동과 취미를 통해 품격을 드러내고자 하는 상류층의 욕구가 그것이다. 하지만 부유층은 있어도 상류층이라 부를 만한 성숙한 계층은 없는 한국의 특수한 문화적 환경 속에서 이런 욕구는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드러난다. 명품 소비가 그것이다. 자신을 상류층화 해 드러내고 싶어 하는 돈 있는 사람들에게 명품은 아주 효과적인 과시수단이 된다.
한국의 명품시장은 명품업체들 스스로도 놀랄 정도의 폭발적인 성장을 하고 있다. 한 명품사의 경우 지난 10년 사이 한국에서의 영업 순이익이 무려 100배나 늘어났다. 한마디로 한국은 명품업체들에게 황금 알을 낳는 거위다. 경제적 성장과 함께 사회의 이동성이 높아지면서 자신을 다른 이들로부터 구별시키고 싶어 하는 계층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얘기다.
최근 한-EU FTA가 발효되면서 유럽산 제품에 대한 관세철폐로 명품가격도 내리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했던 명품족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것은 명품의 본질을 잘 모르는 데서 나온 헛된 기대였다. 이들의 소망과 달리 명품업체들은 가격 인하는커녕 오히려 가격을 올리는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명품은 물건이 아니라 신분의 상징으로 활용되는 기호이다. 누구나가 가질 수 있을 때 그것은 명품으로서의 효용을 상실한다. 명품업체들은 가격을 올릴수록 구별 짓기의 기능이 두드러지게 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안다.
특히 한국과 같은 아시아 지역에서 한층 더 명품에 열광하는 이유를 이들은 꿰뚫고 있다. 그것은 다른 이의 시선을 지나치게 의식하는 문화이다. 그래서 유럽의 명품업체들은 자국민들을 상대로 한 마케팅에서는 저렴한 이미지로 접근하는 반면 아시아 지역에서는 시장의 적정선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책정하고 있다. FTA 발효 후 오히려 가격을 올린 역발상 전략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샤테크’라는 것이 유행하고 있다고 한다. 명품인 샤넬제품과 재테크를 합성한 말로 샤넬을 사재기 한 후 되팔아 돈을 버는 재산증식 수단이다. 사재기를 하면 자연스럽게 가격은 오르게 돼 있고 이것을 되팔아 짭짤한 수익을 얻으면 또 다시 사재기를 하게 된다. 명품 가격이 계속 오를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또 하나의 사회현상이다.
그러나 명품업체들이 어느 나라에서 보다 한국에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 보다 근본적인 배경은 다른데 있다. 다름 아닌 한국사회에 만연한 질시의 감정이다. 이런 사회적 토양은 소비행태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에서 밤 뉴스에 명품매장을 비판하는 보도가 나간 다음날이면 부유층들이 발길을 끊는 대신 ‘지고는 못 사는’ 질시형 소비자들이 몰려든다고 한다. 비판 보도가 본의 아니게 광고가 되는 것이다.
명품시장이 정말 돈 있는 소수의 소비만으로 계속 성장하기는 힘들다. 경제적 능력이 안 되는데도 기를 쓰고 부유층을 흉내 내려는 소비자들이야말로 명품업체들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라고 할 수 있다.
나와 남을 구별하려는 욕망, 그리고 가랑이 찢어지는 것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앞서 있는 다른 이를 따라 잡으려 하는 질시의 감정이 존재하는 한 명품시장 호황의 불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명품업체들은 명품족들의 심리를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 명품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한국 사람들은 업체들의 손바닥 위에 놓여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