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성경에 솔로몬의 재판 이야기가 나온다. 두 여자가 아기 하나를 두고 서로 자기 아기라고 싸우자 솔로몬이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명 판결을 내리는 장면이다.
한집에 사는 창기인 두 여자는 사흘 간격으로 해산을 했다. 그런데 어느 날밤 한 아기가 죽자 그 엄마가 아기를 바꿔치기하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진실을 밝혀줄 목격자도 증거도 없다.
솔로몬은 “칼로 아기를 둘로 나눠 반반씩 나눠주라”고 명한다. 그러자 한 여자는 공평하게 나눌 것을 요구하고 다른 여자는 읍소 한다. “내 주여, 산 아이를 그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왕은 그 여자가 진짜 엄마라고 판결을 내린다. 애끓는 모성애가 바로 증거였다. 인간의 본성을 꿰뚫는 통찰력으로 솔로몬은 지혜로운 판결을 내렸다.
증거와 시스템 중심으로 돌아가는 21세기 미국의 법정이라면 어떨까. 여전히 솔로몬의 지혜가 빛을 발할까.
딸을 죽인 혐의를 받던 젊은 엄마가 며칠 전 무죄평결을 받으면서 미 전국이 시끌시끌하다. 미디어들이 TV드라마 방영하듯 선정적으로 보도해온 이 사건은 2008년 6월 발생했다. 플로리다의 케이시 앤서니(25)라는 여성이 19살 때 낳은 사생아, 케일리(당시 2세)가 사라지고, 그 6개월 후 집에서 멀지 않은 숲속에서 심하게 부식된 사체로 발견되었다. 덕 테이프 조각들이 질식사를 암시할 뿐 현장에는 지문은 물론 물증이 될 만한 아무런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검찰은 평소 생활이 문란했던 케이시가 아이로 인해 묶이는 게 싫어서 딸을 살해했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이를 뒷받침할 물증을 제시하지 못했다. 모든 정황적 증거, 그리고 여론은 케이시를 지목했다. 아이가 없어졌는데도 실종신고는커녕 파티를 전전하고, 아기의 행방을 묻는 그의 부모에게 베이비시터가 데려갔다고 거짓말을 하는 등 딸을 잃은 엄마의 슬픔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 형사재판에서 유일무이한 가치는 ‘증거’이다. 진실도, 도덕도, 정의도 혹은 솔로몬의 혜안도 그 다음이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하고 직접적 증거가 없는 한 ‘유죄’가 아니다. 결국 케이시에 대한 플로리다 배심원단의 ‘무죄’ 평결은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유죄가 아니다’는 것이고 ‘죄가 증명되지 않았다’는 말이 된다.
재판은 일종의 ‘증거 찾기’ 게임이다. 죄지은 자를 놓아주는 한이 있더라도 죄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처벌받는 일은 막자는 원칙이다. 피고의 인권을 존중하는 숭고한 취지인데 때로 그로 인해 피해자의 인권이 무시되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주류사회의 시선이 온통 케이시 앤서니 평결에 쏠려있던 5일 남가주에서는 한인여성 수지 김 민권침해 배상 청구소송에 대한 평결이 있었다.
수지 김 사건은 지난 2009년 4월 김씨(당시 37세)가 경찰의 정지 명령을 무시하고 도주하다 추격전 끝에 샌타애나 경찰의 총격에 사망한 사건이다. 부검 결과 혈액에서 알콜과 코케인 성분이 검출된 것으로 보아 그는 음주운전으로 적발될 것이 두려워 무작정 도주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차안에는 13개월 된 그의 딸이 같이 타고 있었지만 아기는 무사했다.
졸지에 딸을 잃은 김씨 부모는 경찰이 불필요하게 과잉 대응해 딸을 죽게 했다며 민권소송을 제기했다. 음주 운전을 했다 한들, 그래서 도망가느라 경찰과 추격전을 벌였다 한들 그것이 목숨을 내놓아야 할 중범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총격을 가한 경관은 재판에서 정당방위라고 맞섰다. 김씨의 차량이 자신을 향해 돌진한다고 판단해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변호인단 조사에 의하면 총탄은 자동차의 앞쪽이 아니라 운전석 옆쪽과 뒤쪽 유리를 관통, 경관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다.
공권력에 의해 유린당하지 말아야할 김씨의 민권과 위험 상황에서 자기방어를 할 경찰의 권리 사이에서 배심원단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배심원 8명 중 6명은 경찰의 과잉 대응 의견을 낸 반면 나머지 2명은 ‘과잉’인지 여부에 확신이 없다고 말해 재판은 무효가 되었다.
민주사회는 가장 약한 사람의 인권도 보장하는 사회이다. 케이시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하지만 죽은 딸, 케일리의 인권도 존중되어야 한다. 경찰 총격에 사망한 수지 김의 인권은 더 더욱 존중받아야 한다. 인권과 인권이 부딪칠 때 그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눈에 보이는 증거만이 아니라 ‘솔로몬의 지혜’도 필요한 것 같다.
권정희 논설의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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