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벌의 효과가 높은 처벌은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빼앗는 일일 것이다. 자기외모에 흠뻑 취해 있는 공주병 여인에게는 거울 없는 방에 가두는 것이 가장 가혹한 형벌이 되듯 말이다.
조선시대 후기에 죄를 저지른 관리들에게 행해지던 형벌 중에 ‘팽형’이라는 것이 있었다. 글자 그대로 끓는 물에 삶아버리는 형벌인데 주로 관직을 매매하거나 사리사욕으로 가문과 사직의 명예를 더럽힌 관리들에게 내리던 형벌이었다. 방법은 커다란 솥을 걸고 그 아래에 장작을 쌓는다. 그리고 독직 관리를 데려와 흰옷을 입히고 솥 안에 들어가게 한다. 하지만 실제로 불은 때지 않고 때는 시늉만 한다.
일단 가마솥 안에 들어갔다 오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일단 팽형을 선고받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름을 더럽히고 구차한 삶을 이어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는 것이다. 명예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기풍이 남아 있던 시절의 이야기다.
부끄러움이 사라진 요즘 세태에 뇌물 좋아하는 관리들에게 팽형을 내린다면 징벌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 있을까. 아마도 잠깐의 수치스러움만 견디면 된다며 눈 질끈 감은 후 언제 그랬느냐는 듯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이런 관리들에게 가장 혹독한 형벌은 명예가 아닌, 그들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재산을 빼앗은 벌이 아닐까 싶다.
세계에서 가장 청렴한 국가로 꼽히는 싱가포르는 강력한 부패 추방운동을 통해 깨끗한 나라를 만들고 있다. 싱가포르의 부패공직자 처벌의 핵심은 가차 없는 재산압류이다. 부정부패를 통해 형성한 재산은 물론이고 그런 혐의가 있는 재산까지 몰수한다. 초법적으로까지 비춰질 수 있는 강력한 단속과 처벌을 통해 “수치심은 순간이고 재산은 영원하다”는 잘못된 인식이 자리 잡을 여지를 없애 버렸다.
최근 한국사회 곳곳에서 부정부패의 악취가 진동하자 정부는 ‘부패와의 전쟁’을 선언하고 나섰다. 대대적인 감사와 사정이 예고됐으며 공직사회는 바짝 얼어붙고 있다. 하지만 정권이 흔들린다 싶으면 의례적으로 벌어지는 이벤트성 단속을 통해 부패의 뿌리가 뽑힐 것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은 거의 없다. 한국민들의 의식 속에는 부정부패가 새삼스럽지 않은 일로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부패의 일상화에 따른 무감각 증세이다.
부패 단속이 그나마 효과를 거두려면 한 가지 전제조건이 뒷받침돼야 한다. 깨끗한 손에 사정의 칼이 쥐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단속과 처벌은 항상 반발과 저항을 불러오게 돼 있다. 이것을 무력화시킬 수 있는 힘은 물리력이 아니라 도덕적 권위이다. 그런 권위는 나와 다른 이에 적용하는 잣대가 한결 같고, 상대의 약함과 강함에 따라 기준이 춤추지 않는 일관성과 엄격함에서 나온다.
현 정권은 이런 점에서 심각한 결함을 지니고 있다. 지금 모두가 목도하고 있는 심각한 부패는 좀 더 배불리 먹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에 도덕적인 흠결에 눈을 감고 표를 던진데 따른 대가이다. 이렇게 뽑힌 지도자는 고위공직자를 쓸 때 “일만 잘하면 된다”며 웬만한 위법과 탈법, 그리고 파렴치 행위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태도를 보여 왔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한국사회의 도덕적 기준이 돼 버렸다. 금품수수로 파면 혹은 해임된 공무원 수가 지난 4년 사이에 무려 5.5배나 늘었다는 사실은 이런 사회상의 한 단면에 지나지 않는다.
불자들 사이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한 스님은 “대통령이 도덕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을 때 마다 실소가 나온다”고 말한 적이 있다. 또 한나라당의 한 중진의원은 대통령이 “온 나라가 썩었다”고 질타하자 “자기 일을 마치 남의 말 하듯 한다”고 꼬집었다. 이런 정서가 이들만의 것일까. 아마도 사정의 삭풍에 바짝 엎드린 공무원들이 속으로는 “너나 잘 하세요”라며 주먹감자를 날리고 있을지 모른다.
지도자를 결정할 때 손바닥처럼 뒤집히고 휴지조각처럼 버려지는 허황된 공약에 현혹되지 않고 얼마나 깨끗한 손을 가졌는지부터 살피는 일은 더할 수 없이 중요하다. 때가 많이 묻었는데도 유능한 경우란 없다. 만약 그렇게 보인다면 그것은 일시적인 착시현상일 뿐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때문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은 법이다. 이것이 만고불변의 자연법칙이자 인간사회의 법칙이다. 유난히 물 공사를 좋아하는 정권이 정작 기본적인 물의 법칙은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답답한 아이러니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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