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도 프랑스 대선에서 자신들에게 승리를 안겨 줄 것으로 굳게 믿었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이 지난 달 뉴욕에서 성추행 혐의로 체포되자 프랑스 진보진영은 충격에 빠졌다. 그리고 절망했다. 그러면서 스트로스칸이 우파가 놓은 덫에 걸려들었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른바 ‘음모론’이 제기된 것이다. 누가 봐도 스트로스칸의 행위는 성적 충동을 조절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범죄임에도 진보진영의 절반 이상이 이런 음모론을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상황에 직면할 때 마음의 혼란을 잠재워 줄 어떤 설명을 찾게 된다.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보다는 터무니없거나 나쁜 설명이라도 있는 것이 낫다고 여기며 간절히 원하게 된다. 이런 욕구를 파고드는 것이 음모론이다.
일반적으로 상황의 모호함을 잘 견디지 못하는 보수적인 사람들이 음모론에 좀 더 쉽게 걸려들지만 스트로스칸의 경우에서 보듯 진보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수준의 음모론이 전방위 미디어 시대에는 가공할 속도로 퍼져나간다. 그런 만큼 음모론의 영향력과 파괴력도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사람들이 무기력하다고 느낄 때, 그리고 그들이 바라는 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좌절할 때 음모론이 판치게 된다. 이것을 정확히 포착해 마케팅 대박을 터뜨린 인물이 케이블 TV인 폭스뉴스의 프로그램 진행자인 글렌 벡이다.
극우주의자인 글렌 벡은 2009년 1월부터 자신의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면서 매일 밤 300만명이 넘는 시청자들을 TV 앞으로 끌어 모았다. 오바마에 대한 원색적인 비난은 기본이고 미국의 붕괴가 임박했으니 식품을 사재기하라고 선동하고 수집용 금화를 제외한 민간소유 금을 연방정부가 압수할 것이라는 등 온갖 근거 없는 음모론을 퍼뜨렸다.
벡이 TV에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시기는 오바마 정권의 등장으로 보수진영이 허탈감과 좌절에 사로잡히고 전례 없는 경기침체로 불안감과 불확실성이 터질 듯 팽배하던 때였다. 벡의 종말론적 주장은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과연 저것을 믿을까 싶을 정도로 황당하고 선동적인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그의 추종자들에게는 복음이었다.
분노하는 영혼들을 결집시키는데 음모론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찾아보기 힘들다. 벡은 자신의 프로그램을 이용해 정치적으로,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그의 말 한마디에 수만명이 워싱턴에 모였으며 그가 내는 책은 추종자들의 열성적인 구입 덕분에 곧바로 베스트셀러에 진입했다. 지난 2년 동안 그는 정말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음모론에 기댄 인기는 새로운 투자가 계속 뒤따르지 않으면 정체를 드러내게 되는 폰지 사기와 같아서 계속 새로운 불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무너지게 돼 있다. 경제 상황이 나아지면서 프로그램은 점차 시청자들의 외면을 받기 시작했다. 벡의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불편하게 여긴 광고주들은 광고를 뺐다. 그러더니 결국 프로그램의 간판을 내린다는 결정이 나왔다.
극우의 상징이었던 글렌 벡의 TV 무대로부터의 퇴장을 미국사회에 이성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는 작은 징후로 해석한다면 너무 성급한 것일까. 지난 중간선거에서 기세를 떨치며 정치권 지형을 바꾸어 놓았던 극우 풀뿌리 운동 티파티의 지지도가 급속히 떨어지고 있는 현상과 연결시켜보면 의미 있는 흐름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
미국을 지탱시켜 온 건전한 보수를 좀먹는 것은 겉으로는 보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인간에 대한 예의를 상실해 온 일부 극단주의자들이었다. 내가 건강해 지는데 다른 이의 질병은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보수주의를 병들게 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 건강하지 못한 보수다. 내 속의 환부를 도려내지 않고서는 건강을 지켜갈 수 없는 법이다.
미국사회가 지난 30년간의 극단적인 이념 대립에서 벗어나 존중과 배려가 있는 합리적인 경쟁체제로 회귀하려면 서로에 대한 적대적인 감정부터 희석시켜야 한다. 건전한 보수와 건전한 진보의 확대는 그래서 중요하다. 극우 퇴조의 작은 징후는 진보에 반가운 소식이기 이전에 진정한 보수가 먼저 환영해야 할 일이다.
조윤성 논설위원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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