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출산을 앞둔 후배 여기자와 점심을 먹다가 요즘 엄마들의 태교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신세대 임신부들이 태교에 쏟는 정성이 이만저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입 수험생처럼 ‘수학 정석’을 꺼내 수학 문제를 풀고, CD로 영어공부를 하면서 태아에게 영어 노래와 동화를 들려준다고 한다. 몸이 무거워 가만있어도 힘 드는 임신부들이 공부에 매달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우리 아기 최고로 키워내겠다’는 각오이다. 뱃속에서부터 수학공부를 하면 아기의 논리적 사고능력이 좋아지고, 영어는 태아 때부터 익혀야 경쟁력이 생긴다는, 확인 불가한 이론이 배경에 깔려있다.
그뿐이 아니다. 섬세한 손동작이 요구되는 십자수 역시 태교의 필수과목이다. 아기의 운동기능을 발달시켜 준다는 것이다. 거기에 임신부 요가며 음악 감상, 명화 감상 등도 추천되니 이만하면 임신은 풀타임 근무다. 산부인과 병원들이 문화센터를 운영할 정도이다.
사회가 점점 무한경쟁 시대로 들어가면서 아기들이 엄마 뱃속에서도 쉬지 못하고 훈련을 받는 셈이다. 가엾은 세대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의 서남표 총장이 요즘 십자포화를 맞고 있다. 한국의 최우수 과학 영재들이 모인 그 대학에서 최근 4명의 학생이 잇달아 자살하자 화살이 서 총장에게로 향했다. 그의 교육개혁이 너무 살벌한 경쟁 분위기를 조성해서 학생들을 죽음으로 내몰았다는 비난이다. 개혁과정에서 그가 일방적이고 독단적이었다고 하니 그 부분에서 그는 책임을 느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죽을 만큼 힘든 좌절감에 빠지게 한 책임이 오로지 서 총장 한 사람에게 있을까. ‘1등만 알아주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개그가 설득력을 얻는 그 사회의 전반적 풍토와는 상관이 없는 걸까.
이번에 가장 비난을 받은 제도는 학점 나쁘면 벌로 수업료를 내야 하는 차등 등록금제와 전과목 영어강의였다. 2006년 이런 정책이 발표되자 학생들은 크게 반발했었다. 학점이 상대평가인 만큼 누군가를 밟지 않으면 내가 밟히는 시스템에서 “대부분 학생들은 병들고 곯아서 망가져 버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왔다. 그 우려가 이번에 현실로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당시 서 총장의 개혁에 한국사회는 환영일색이었다. 학생들이 더 열심히 공부하게 밀어붙이고, 영어 경쟁력을 높여 국제적 인력으로 키우겠다는 데 대해 모두가 박수를 보냈다. 서 총장의 개혁은 ‘1등, 1등’ 하는 사회분위기와 톱니바퀴처럼 잘 들어맞았다. 영어·수학 공부라는 기상천외한 태교 역시 이런 사회분위기의 소산일 것이다.
엄마의 영어·수학 공부가 아기에게 해로울 리는 없을 것이다. 해로운 것은 엄마의 그런 태도이다.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한 발짝이라도 더 빨리, 한 단계라도 더 높이 가게 만들려는 이상 교육열이 사회 전체를 숨 막히는 경쟁의 도가니로 만들고 있다. 누구도, 한시도 긴장을 풀 수 없는 경쟁체제에서 아이들의 삶은 고되고 힘들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미국에서도 교육열 과열현상이 보이고 있다. 자녀를 일류로 키우기 위해 유치원 때부터 ‘관리’에 들어가는 부모들이 점점 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지난 1월 출간돼 엄청난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호랑이 엄마의 승전가’의 에이미 추아 교수.
중국계 1.5세로 예일대 법대교수인 그는 “아이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면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호랑이처럼 무섭게 닦달해야 아이들이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해 일류로 성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펼쳤다가 호된 질타를 받았다. 아동학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렇게 자란 추아 교수의 딸이 이번에 하버드에 입학하자 많은 부모들은 헷갈린다. 경쟁 심한 이 사회에서 아이들을 어떻게 기르는 것이 최선일지 정답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대학에서는 입학생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고 한다. 찻잔과 크리스피. 깨지기 쉬운 찻잔과 건드리면 바스러지는 과자 크리스피다. 전자는 부모의 지나친 보호로 유약한 형, 후자는 부모가 너무 강압적으로 몰아붙여 지칠 대로 지친 형이다. 둘 다 기대 이상의 충격이 가해지면 그대로 무너져 내릴 위험을 안고 있다.
자녀의 성공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집착이 종종 아이들을 망친다. 무한 경쟁시대를 사는 아이들일수록 좀 내버려 둘 필요가 있다. 때로는 넘어지고, 때로는 방황하며 스스로 길을 찾는 경험이 가장 확실한 경쟁력의 밑거름이 될 것이다.
권정희 논설위원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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