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인자하지 않다더니 또 한번 확실하게 오만한 인간들을 무릎 꿇렸다. 규모 9의 대지진이 강타한 일본 전역은 극도의 패닉상태에 빠져 있다. 여기에 방사능 공포까지 더해져 말 그대로 생지옥이다. 지진 후 발생한 쓰나미는 미 서부 연안까지 높은 파고를 몰고 왔다. 이와 함께 대재앙의 공포까지 몰고 와 많은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
특히 이번처럼 대지진의 참혹함이 시각적으로 생생히 전달돼 올 때면 공포가 급속히 증폭된다. 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과거 지진의 흔들림이 되살아나고 온갖 상상이 일어난다. 지진 공포증 환자들을 위한 조언을 한마디 하자면 당분간 TV뉴스는 멀리 하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글보다 감정을 더 자극한다. 현장의 끔찍함을 이미지로 전달해 주는 TV뉴스는 종종 공포증 환자들의 증세를 악화시킨다. 그래서 공포를 많이 느끼는 사람들에게는 TV뉴스를 보는 것보다 신문을 읽는 것이 더 건강한 습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공포는 합리적인 감정이 아니다. 리스크가 높다고 공포가 커지고 반대로 낮다고 해서 작아지는 것이 아니다. 테러에 의해 희생될 확률은 식품 앨러지 때문에 죽을 확률보다도 낮지만 테러가 안겨주는 공포의 크기는 앨러지에 비할 바가 아니다. 우리가 느끼는 공포의 크기를 가장 많이 좌우하는 것은 불확실성이다.
지진은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더욱 큰 공포로 다가온다. 과학이 발전했지만 지진은 여전히 장기적인 확률로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이번에 일본 대지진이 발생하자 그 전에 있었던 몇몇 자연현상이 전조가 아니었느냐는 풀이가 나오지만 이것은 예측이 아니다. 기껏해야 일이 발생한 다음 “내 그럴 줄 알았어”라고 하는 사후편향의 해석일 뿐이다.
정확한 지진 예측이 힘든 것은 지진의 물리적 메커니즘이 ‘카오스’적이기 때문이다. 지층 속의 조그만 움직임은 나비효과처럼 다른 단층에 연쇄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것을 정확히 예측해 내기란 불가능하다. 같은 자연재해로 지진 못지않게 파괴적인 홍수 또한 카오스의 영향을 받지만 하늘의 움직임은 그래도 땅속의 움직임보다는 한결 예측이 가능하다.
비합리적인 감정인 공포는 그것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하여금 비합리적으로 행동하고 선택하게 만든다. 재난 전문가들은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어떻게 판단하고 행동하느냐가 삶과 죽음을 가르게 된다고 말한다. 재난 가운데서의 생과 사는 신의 선택이나 운이 아니라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달린 문제라는 것이다. 이들은 이것을 ‘재난 인격’(disaster personality)이라고 부른다. 재난 인격은 침착성에서부터 대처 방법의 숙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태도와 기술을 아우른다. 재난 인격이 뛰어날수록 당연히 생존확률은 높아진다.
위험하고 힘든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원들의 혈액을 검사해 보면 다른 군인들과 두드러진 차이가 나타난다. 신경펩티드 Y라는 물질의 수치가 훨씬 높다.
이 물질은 스트레스 상황에서 자신의 임무에 집중하도록 도와주는 화합물이다. 일상생활에서 불안장애 혹은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이 수치가 낮다. 특수부대원들의 이런 특징은 타고난 것일 수도 있고 훈련을 통해 형성된 것일 수도 있다.
재난 인격에는 이처럼 선천적인 것과 후천적인 것들이 뒤섞여 있다. 차분함 같은 선천적인 요소는 그렇다 치더라도 재난 상황에 대비한 반복적인 훈련을 통해 후천적인 부분은 얼마든 향상시킬 수 있다. 9.11테러 때 평상시 계단 대피훈련을 반복적으로 실시했던 기업의 직원들은 생존율이 훨씬 높았다.
지난 2009년 1월 기관고장을 일으킨 US 에어웨이스 항공기가 허드슨 강에 비상착륙해 150여명 승객들이 목숨을 건진 것도 기장 한 사람의 뛰어난 재난 인격 덕분이었다. 그러나 재난 상황에서 모두가 이런 행운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막연한 공포에 무기력하게 사로잡혀 있기 보다는 재난 인격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인 행동을 하는 게 보다 현명하고 현실적이다.
재난에 대처하는 개인들의 태도와 능력에 차이가 있듯 국가들 간에도 이것이 확연히 갈린다. 만약 이것을 ‘재난 국격’이라 부를 수 있다면 일본의 ‘재난 국격’은 최고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참사 가운데서도 일본은 시민들의 뛰어난 질서의식과 언론의 차분한 보도, 그리고 체계적인 경보 시스템을 통해 재난에 대처하는 지혜를 확실히 보여줬다. 일본은 전체적으로 신경펩티드 Y의 수치가 대단히 높은 사회라 할 수 있다. 일본의 모습은 개인들의 재난 인격과 관련해서도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
yoonscho@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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