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LA 동부지역에 사는 한 남성독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분은 지난 1월말에 환갑을 맞았다고 했다. 환갑날 혼자 앉아서 밥을 먹자니 참담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더라고 했다.
"너무 힘이 듭니다. 누구하고든 말을 하고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저지르고 싶은 심정입니다."
미국생활 37년, 결혼생활 33년 - 그는 갑자기 혼자가 되었다. 아내가 한 달여 전 가출을 한 것이다. "인생 말년에 서로 의지하며 살아야 할" 아내가 집을 나간 후 그는 위기감과 공허함에 이성을 잃을 지경이라고 한다. 가정파탄의 주범으로 그는 동창회를 원망했다. 그의 아내가 몇 년째 여고 동창회의 임원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내는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는 성격입니다. 동창회 일에도 최선을 다하지요. 그런데 너무 동창회 일에 매달리다 보니 가정에 소홀해진 것입니다."
바깥 모임이 잦아진 아내, 그것이 못마땅한 남편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지다가 어느 날 충돌 후 아내가 짐을 싸서 나가버린 것이다. 남편의 설명을 들으면 부부사이에 객관적으로 이혼사유가 될 만한 요소는 없다. 남편은 자신을 "가족만 아는 성실한 가장"이라고 말하고, 아내 역시 한 직장에서 30년을 일해온 만큼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여성으로 짐작된다.
각자 따로 보면 괜찮은 사람들인데 둘 사이가 원수처럼 나빠졌다.
이 부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50·60대 다른 부부들에게는 이런 일이 ‘남의 일’일까?
KBS의 개그 프로그램 중에 ‘두분 토론’이라는 코너가 있다. ‘남자는 하늘!’이라는 ‘남하당’ 대표와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는 ‘여당당’ 대표가 설전을 벌이는 코미디이다. 남성 개그맨은 전통적 남성중심의 주장을 펼치고, 여성 개그맨은 여성의 시각으로 이를 통렬하게 반박하는 내용인데, 그런 갈등이 개그가 아니라 현실인 세대가 있다. 바로 지금의 중년층이다.
그 윗세대에서 남자는 당연히 ‘하늘’이었다. 그 앞에서 자기 의견을 내세우는 것은 여성으로서 본분을 어기는 일이었다. 반면 젊은 세대 중에 ‘하늘’인 남자는 없다. 여성은 자연스럽게 당당하다. 이들 세대에서 ‘남하당’과 ‘여당당’이 현실로 대립할 일은 없다.
하지만 50대, 60대 부부의 의식을 들여다보면 ‘두분 토론’은 현실이다. 대부분 남편들의 의식은 여전히 가부장적 ‘하늘’에 머물러 있고, 아내들은 ‘여당당’ 대표처럼 퍼붓고 싶은 마음을 꾹꾹 참느라 속이 터진다.
이 세대 아내들이 남편을 향한 불만은 보통 두 가지다. 첫째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서 하나부터 열까지 해다 바쳐야 하는 것. "이제는 나이 들어 힘에 부치는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남편 뒷바라지 하다보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고 주부들은 하소연한다.
둘째는 혼자만 옳다고 여기는 독불장군 식 태도. 사사건건 자신이 옳다며 교사가 초등학생 가르치듯 훈계하려 드는 남편의 잔소리에 신물이 난다는 아내들이 많다. 그렇다고 ‘여당당’ 대표처럼 대놓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되면 싸움이 되어 집안이 시끄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목까지 차오르는 말들을 꿀꺽꿀꺽 삼키다보면 결혼생활 연륜만큼 여성들의 가슴에는 답답함이 쌓인다.
황혼이혼이 늘고 있다. 대부분 여성들이 주도하는 이혼이다. 자녀가 성장해 독립하고 경제력이 있는 여성들은 남편의 외도나 폭행, 도박, 알콜중독 등 이혼 사유가 있을 때 더 이상 참지 않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객관적 이유가 없는 데도 이혼을 고려하는 중년여성들이 많다"고 한인가정상담소의 김경희 카운슬러는 말한다.
"이대로 그냥 살기는 너무 억울하다는 거예요. 남편으로부터 따뜻한 정을 못 느끼는 케이스들이지요. 정서적 허전함이 굉장히 큰 불만으로 작용합니다."
묵묵히 아내로 엄마로 살던 여성의 일탈은 보통 나를 찾고 싶은 욕구의 발로이다. 결혼생활 내내 남편과 자녀의 뒷전에 밀려있던 자신을 문득 되찾고 싶은 욕구가 중년의 허전한 가슴에 밀려드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누구의 아내도, 누구의 엄마도 아닌 나 자신으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그런 무대를 찾고 싶어 한다. ‘동창회’도 그중 하나일 것이다.
중년은 인생의 끝을 의식하는 나이이다. 얼마가 될 지 모를 여생, 아무런 구속받지 않고 나 자신으로 행복하고 싶은 욕구가 누구에게나 있다. 상대방의 그런 마음을 헤아리는 배려가 중년의 부부에게는 특히 필요하다. ‘함께’그러면서 ‘따로’ 사는 것이 노부부로 오순도순 늙어가는 비결이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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