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조상이 아프리카에 출현한 것은 지금부터 약 500만년 전으로 추산되고 있다. 인간이 문자를 발명해 쓰기 시작한 것은 약 5,000년 전이니까 499만5,000년 동안 인간은 문자 없이 살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 장구한 세월 동안 읽고 쓰는 일 없이 살았던 인간은 어째서 어느 날 갑자기 문자를 발명했으며 그 이후 줄곧 이를 사용해 오고 있는 것일까.
인간이 문자를 발명한 시기는 문명이 일어난 시기와 일치한다. 모든 문명은 대규모 영농과 도시 국가, 세금이 특징이다. 하루하루 토끼 잡고 풀 뜯어 먹고 살 때는 글이 필요 없었다. 머릿속에 저장해 둔 정보만으로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1만년 전 농사가 처음 시작됐을 때도 그랬다. 몇몇이 조그만 마을을 이뤄 살 때는 문자가 필요 없었다.
그러나 사람 수가 수만으로 늘어나고 이들에게서 세금을 거둬야 할 필요가 생기자 머리 속 계산만으로는 숫자를 맞출 수 없었다. 실제로 인류 최초의 문자로 꼽히는 메소포타미아의 쐐기 문자로 쓰여진 진흙 판 문서 내용의 대부분은 세금 출납 기록인 것으로 타나났다.
왜 중동 사람들은 진흙 판에 글자를 썼을까. 진흙 판이 글자 쓰기에 가장 흔하고 편한 재료였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기에 상형 문자를 발명한 이집트인들은 나일 강가에 널려 있는 파피루스를 원료로 한 종이에 글자를 썼다. 파피루스는 잘 알려진 대로 영어 ‘페이퍼’의 어원이다. 그리스 인들은 이 파피루스가 제일 많이 수출되던 지금 레바논의 한 도시를 ‘바빌루스’라고 불렀고 이것이 그리스 말로 ‘종이’를 뜻하게 됐다. 이것이 성경을 의미하는 ‘바이블’의 어원이다.
양이 흔했던 그리스인들은 양피지에, 중국인들은 동물 뼈, 특히 거북이 껍질에 글자를 썼다. 이렇게 쓰여진 글은 진흙 판보다는 가지고 다니기 편하고 파피루스보다 오래 가는 장점이 있지만 비싸다는 흠이 있었다.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디세이 한 편을 쓰려면 양 수 백 마리가 희생돼야 했는데 이런 돈을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았다.
후한 시대 채륜이 종이를 발명하자 이것이 점차 전 세계로 퍼져 최근까지 정보를 보관하고 전달하는 주요 수단이 됐던 것은 이 때문이다. 그만큼 싸고 편리하고 오래 정보를 보관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러나 더 이상은 아니다. e북이라는 것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마존에서 나온 킨들은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3,500권이 들어간다. 책값도 성경 같은 고전은 공짜고 최근작도 종이책보다 훨씬 싸다.
종이책에 익숙한 구세대는 죽을 때까지 종이책을 버리지 않겠지만 이제 인생을 막 출발하는 신세대는 굳이 편한 전자책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 무거운 교과서를 책가방에 가득 넣는 대신 e북이나 태블릿 PC 하나 들고 등교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미국에서 2번째로 큰 대형 서점 체인인 보더스가 지난 주 파산을 신청했다. 40년 전 미시건 앤 아버에서 탐과 루이스 보더스 형제가 첫 가게 문을 연 후 전국적으로 팽창에 팽창을 거듭하며 수많은 군소 서점 문을 닫게 만든 체인이 생사의 기로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 이유로는 지나친 확장과 무리한 자사주 매입을 통한 자금난 등 여러 가지가 지적되고 있지만 가장 큰 것은 인터넷 혁명과 함께 온 우편 주문과 e북의 출현 등 시대의 흐름을 잘못 읽은 것이다. 2000년 아마존의 미국 책 시장 점유율은 5%, 보더스 15%였지만 이제는 아마존 22%, 보더스 8%로 완전히 역전됐다. 이런 추세는 앞으로도 바뀌지 않을 전망이다.
문자 발명 이후 흐름을 살펴보면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필요와 편리임을 알 수 있다. 필요가 발명을 낳고 발명된 것 중 인간은 편리한 것을 선택한다. 정보의 보관과 전달 필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지만 그 수단이 꼭 종이여야 할 이유는 없다. 종이 책은 진흙 판과 양가죽, 거북이 껍질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과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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