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교회를 다니면 한가지 편한 점이 있다. 대부분의 교인들이 집사라 굳이 이름을 알아둘 필요가 없다. 그냥 “집사님”하고 부르면 된다. 눈살을 찌푸리면 즉시 “장로님” 하면 된다. 전 세계 기독교인 중에 집사는 아마 한인들이 가장 많을 것 같다. 어느 한인 교회에서는 모두가 집사다. 성경 어디에 전 교인을 집사로 임명하라고 했는지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집사 직분을 안주면 다른 교회로 가겠다는 사람도 있고보니, 집사 직분을 감투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실질적인 전도가 더 어려울 때도 있다.
몇년 전, 어느 한인 교회에서 담임 목사의 기도 중 이름이 떠올라 집사로 추천하니, 불가피한 사정이 있으면 그 이유를 전화로도 안되고 반드시 써서 제출하라는 연락이 왔다. 그리스도는 구원을 받으려면 회개하라고 하셨지, 구원을 안받으려면 그 이유를 서면으로 제출하라는 이야기는 성경 어디에도 없다. 개인적으로는 성령 역사의 동시성을 믿는다.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 바울과 아나니아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 성령은 당사자 모두에게 동시에 감동을 주셨다. 그 목사의 글에 자신의 기도 중 본인 이름이 추천되었다고 했지만, 어떻게 기도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집사로 세우라는 응답이 왔나 싶기도했다. 성경의 사도 행전을 보면 일곱 집사들이 선출된 이유는 많은 제자들을 이끌 지도자들을 선출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집사는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스데반 집사를 통해 보듯이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또한 빌립 집사를 통해서는, 자녀를 믿음으로 키운 사람이 집사가 되어야 한다. 성경은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줄 알지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디모데 전서 3:5)”한다.
2001년 10월 프레즈노에서 있었던 빌리 그레이엄 전도 대회를 위해 대회 본부에서 한국어 강사로 출강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었다. 프레즈노의 어느 한인 교회에서 강의가 있었는데, ‘폴 손 목사’라고 소개하길래 목사가 아니라고 했더니, 소개하는 분이 “오늘 목사로 진급했습니다”고 하는게 아닌가? 우리는 높임을 받기를 좋아하지만 너무 높이 올라갔다가 떨어지면 그 충격도 상당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인생길에서 항상 돌아보며 낮은 자세로 사는 것도 좋은 것 같다.
지난 주, 한국 민주노동당 소속 이숙정 성남시의원이 판교주민센터에서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이유로 한 아르바이트 여성직원에게 서류뭉치와 물건을 던지고 머리채를 잡아당기며 위협을 하는 등 난동을 부리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 TV가 언론에 공개되면서 논란이 됐다. 전화 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즉각 알아듣고 “이의원님”이라는 답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정도의 일에 쉬 흥분하고 머리채를 잡아당겼다면 유권자를 기만한 행동으로 벌써부터 함량미달의 초보 정치인이다. 저러다 또 선거 때가 되면 고개 숙이며 표를 달라고한다. 이러한 위선자를 먹여살리느라 뼈빠지게 세금내고도 감투없이 그들에게 무시당하는 사람들만 불쌍한 사회가 되었다. 그래서 모두 감투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가?
민주노동당의 이정희 대표는 “이번 문제는 당 전체가 함께 책임지고 풀어가야 될 문제이고 먼저 저부터 사죄하고 스스로 성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벌어져서 진심으로 죄송하다… 당기위원회에서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절차를 진행할 예정”이라고 덧붙였다. 어디까지가 진심인지는 두고봐야겠다. 민주주의를 내세우며 노동자를 위한다는 정당 출신의 한 여성 시의원이 자신보다 훨씬 더 어린 여성 노동자의 머리채까지 잡아당긴 이 사실은 분노를 넘어 측은함까지 들게 한다. 시의원이 그렇게 대단한 감투인지는 몰라도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않는 이러한 처사는 정치 폭력이다. 대한민국 정치판의 격분, 폭언, 폭력등 비이성적인 언동은 영원히 추방되어야할 것이다.
조상들의 양반 제도 덕분에 우리도 양반이고 싶어한다. 남을 부를 때에도 “이 양반” “저 양반” 한다. 직함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는지, 모두 사장이고 모두 회장이다. 만약 서로 “박 상놈” “김 상놈”하며 불렀다면 어떻게 될까? 감투에 주리고 목마른 환경이 한국의 풍토를 만들고 있다. 그래서 출세하려는 교육열은 오바마와 세계가 다 알아준다. 신약 성경의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 중에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라는 복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에 주리고 의에 목말라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지, 감투에 주리고 목말라 스스로 대우받으려는 자에게는 복이 오다가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을 명심하고, 남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되어 하늘로부터 오는 또 다른 복도 받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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