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미국에 왔을 때, 가장 인상적인 것은 ‘땅’이었다. 동부 시골에서 미국생활을 시작했는데, 시야가 탁 트인 드넓은 땅이 가슴 아리게 부러웠다. 서울에서 한 뼘의 빈 터도 없이 다닥다닥 붙어살던 시각으로 볼 때 저 넓은 땅을 저렇게 놀려도 되나 싶어 아깝고 부러웠다.
환경이 여유로워서일까, 미국사람들의 삶은 여유로워 보였다. 우리처럼 아등바등 하는 법이 없었다. 특히 부모들이 자녀를 키우면서 ‘공부해라’ 다그치지 않고 성적에 별로 마음 쓰지 않는 것이 신기했다. 아이가 너덧 살이 되면 피아노나 바이올린 레슨 대신 운동을 시키는 것도 의외였다. 성적 스트레스, 입시 스트레스는 다른 나라 아이들의 일이었다. 지구상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강한 나라 국민으로서 미국인들은 여유로웠다.
30년이 지난 지금 세상은 바뀌었다. 부동의 1위 국가로 여유만만 하던 미국의 정체성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미국은 여전히 제1의 국가이지만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까 하는 의구심, 뒤에서 바짝바짝 쫓아오는 듯한 불안감이 국민정서를 파고들고 있다. 지난 2주 인터넷을 가히 전쟁터로 만들었던 ‘중국 엄마 대 미국 엄마’ 논쟁 역시 흔들리는 미국의 최강국 자부심과 상관이 있을 것이다.
지난주 공식적 뉴스의 초점은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의 워싱턴 방문이었지만 비공식적으로 가장 주목받은 인물은 다른 중국인이었다. 중국계 2세인 에이미 추아 예일 법대교수였다. 48살의 엄마로서 15살과 18살의 두 딸을 키운 경험담을 쓴 책 ‘호랑이 엄마의 승전가’가 출판되면서 질시와 비난의 화살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책의 내용을 한마디로 줄이면 아이들을 너무 응석받이로 키우는 미국 엄마 양육법보다 호되게 훈련시켜 1등으로 만들어내는 중국 엄마 양육법이 더 낫다는 것. 11일 출판에 앞서 8일 월스트릿 저널이 내용을 발췌해 보도하면서 처음 알려졌는데, 온라인으로 100만명 이상이 읽고 거의 1만 건의 댓글이 오를 정도로 반응이 뜨거웠다. WSJ이 "왜 중국 엄마들이 더 우월한가"라고 다분히 자극적인 제목을 붙인 것도 열기를 부추기는 데 한몫했다. 중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2000년대 들어 중국의 경제력은 무서운 기세로 커지고 있다. 지난 2005년 프랑스, 2006년 영국, 2007년 독일을 차례로 앞지르더니 2010년에는 1968년부터 2위였던 일본을 제치고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세계의 공장, 세계 최대 외환 보유국이자 미국으로 보면 국채 최대 보유국이 중국이다. 미국이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경제력뿐이 아니다. 지난 12월 발표된 학력평가 결과를 보면 미래의 주역들인 초중등학생들의 실력도 중국 학생들에 뒤진다. 2000년부터 시작된 국제학생평가 프로그램(PISA)의 최근 시험에서 미국학생들 성적은 중간이다. 읽기 17위, 과학 23위, 수학 31위로 종합성적 17위다. 반면 상하이 학생들은 이번에 처음 응시해 단번에 3과목 모두에서 1위를 차지했다.
중국 학생들이 미국 학생들에 비해 공부시간이 더 길고 더 집중해서 열심히 한다는 분석이 뒤따랐다.
이런 와중에 추아 교수의 ‘중국 엄마 우월론’이 나왔으니 미국인들의 반응이 민감하지 않을 수가 없다. 단순히 양육법에 대한 반대의견이 아니다. 태평양 건너 중국을 볼 것도 없이 각급학교마다 중국계를 비롯한 아시안 학생들이 1,2등을 다투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지 오래다. 미 전국 인구의 4%에 불과한 아시안이 아이비리그 등 사립 명문에서 20여%를 차지하고 UC 계열 대학에서는 40~50%를 넘나든다.
추아 교수가 아동학대 수준으로 딸들을 공부시키고 훈련시킨 내용을 보며 "말도 안된다"고 분개하던 미국 엄마들이 다음 순간 생각을 다시하게 되는 배경이다. "내가 아이들을 잘 키우고 있는 건가?" "다른 아이들은 이렇게 ‘호랑이 엄마’ 밑에서 단련 받는 데 우리 아이가 그 경쟁상대가 될 수 있을까?" - 엄마들은 고민에 빠진다.
추아 교수의 ‘중국 엄마’ 양육법은 성취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전형적 이민가정의 양육법이다. ‘호랑이’처럼 아이들을 내몰며 공부시켜 A 받게 하고 명문대학에 입학하게 한다. ‘미국 엄마’ 양육법은 아이의 개성을 존중해서 아이가 하고 싶은 대로 선택하게 하는 양육법. 전자가 인생에서 ‘성공’을 제1의 목표로 한다면 후자는 삶에서 ‘행복’을 중시하는 양육법이다. 날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사회에서 아이를 ‘성공’이라는 기차에 태울 지, ‘행복’이라는 기차에 태울 지 쉬운 선택이 아니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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