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보스니아 내전 때 세르비아계에 의해 무려 25만명의 알바니아 무슬림이 ‘인종청소’라는 명분 아래 학살을 당했다. 당시 보스니아의 한 난민은 이웃 마을의 세르비아 사람들이 자기 마을 사람 35명을 잡아다가 목을 베었다고 워싱턴포스트 기자에게 털어놨다. 기자는 이 증언을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그들은 살해당했다. 그들을 죽인 세르비아인들은 작년에 추수를 도와준 사람들이었고 어린 시절 함께 뛰놀던 사람들이었다. 더운 여름 날 강에서 함께 벌거벗고 헤엄치던 사람들이었고 밤중에 이웃집 소녀들을 함께 꾀던 사람들이었다. 아무 이유도 없어 보이는데 이처럼 멀쩡한 사람들이 갑자기 살인자로 돌변한 것이다.”
평소 선량하던 이웃 세르비아 사람들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들은 정치지도자들이 퍼뜨린 지독한 ‘증오 바이러스’에 감염됐던 것이다. 세르비아 내 코소보 자치주가 독립 움직임을 보이자 세르비아 지도자들은 교묘하게 이들에 대한 적개심을 부추기는 일을 벌였다.
온갖 흉흉한 소문을 내면서 세르비아 사람들의 불안을 자극했다. 또 오래 반목해 온 세르비아와 코소보 간의 해묵은 역사까지 동원됐다. 조그마한 움직임으로 시작된 일이라도 어느 정도 힘을 얻으면 급속히 확산되고 집단화되는 경향을 보인다. 증오가 개입될 경우 더욱 그렇다. 문명화된 현대사회에서 끔찍한 인종학살이 생각보다 빈번히 일어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증오는 집단적인 분위기를 통해 전염되는 바이러스다. 이런 바이러스는 사회적 위기와 존재의 불안감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확산된 바이러스는 만만하고 무고한 희생양을 통해 분출된다. 희생양은 본래 속죄를 위한 종교적 제의에서 비롯됐지만 종종 현실정치의 도구로 악용돼 왔다. 희생양을 만들어 내는데 증오만큼 효과적인 수단은 없다. 인간들이 지닌 부정적 감정들 가운데 가장 강력하고 파괴적인 것이 증오이다. 악성 바이러스인 만큼 전염성이 강하다.
일단 증오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눈이 멀어 버린다. 이들에게 진실이 무엇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지난 주 연방의회에서 한 공화당 의원이 “오바마는 미국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외치는 해프닝이 있었다. 많이 배운, 그리고 국민의 선택을 받았다는 선량의 입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말이 나오도록 만드는 것이 증오 바이러스다.
20세기 초 미국의 역사학자인 헨리 브룩스 애덤스는 “현실정치란 겉으로는 무엇을 가장하든 언제나 체계적인 증오를 조직화 하는데 달려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날카로운 관찰이 아닐 수 없다. 매스미디어가 권력이 돼 버린 지금은 더욱 그렇다.
미국정치는 증오 바이러스에 날로 심하게 감염돼 가고 있다. 타협과 상생을 추구했던 한때의 낭만적인 정치풍경이 사라지더니 이제는 최소한의 금도마저 무너지고 있는 느낌이다. 선거 캠페인은 살벌해지고 동원되는 메시지는 폭력적이다. 특히 보수진영의 수사는 한층 더 선동적이고 자극적이다. 증오 바이러스를 많이, 그리고 널리 퍼뜨릴수록 지지층을 더 결집시킬 수 있다는 계산이 작용하고 있다.
지난 주말 애리조나에서 한 젊은이가 민주당 소속 연방하원의원을 살해할 목적으로 총을 난사해 6명이 숨지고 10여명이 부상을 당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참사에 대해 공화당과 극우 티 파티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한 개인의 소행이라며 책임론을 비켜가려 하고 있다.
물론 극우 정치인이나 논객들이 이 젊은이에게 살육을 직접 지시한 적은 없다. 그렇다고 캠페인과 방송을 통해 평소 민주당과 진보에 대해 증오 바이러스를 널리 퍼뜨려온 이들에게 정말 아무런 책임도 없는 것일까. 돈과 권력이 목적인 사람들이 무책임하게 퍼뜨리는 증오 바이러스가 면역력이 약한 병든 마음에 떨어질 때 어떤 참극이 초래될 수 있는지 이번 사건은 깨우쳐 주고 있다.
바이러스를 퍼뜨린 사람들은 권력을 방패삼아 뒤로 숨으면 그만이겠지만 갈등은 더 깊어지고 사회는 깊은 상처를 입는다. 그러고 보면 기득권이 퍼뜨리는 증오 바이러스에 자신이 감염된 것도 모른 채 폭력적 행동에 나서는 사람들(이들은 대부분 사회 경제적으로 소외계층이다) 역시 교묘한 증오 바이러스의 희생자라 할 수 있다.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사람들과 감염되는 사람들. 이들 중 누구의 책임이 더 큰가. 이번 참사를 보면서 던지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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