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주 남가주 주민들은 새로운 사실을 한가지 알게 되었다. 남가주에도 이렇게 비가 많이 올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비 안 오기로 유명해서 노래까지 만들어진 남가주에서 7일 내내 폭우가 쏟아졌다.
평소 경험해보지 못한 엄청난 강우량에 곳곳에서 침수, 홍수, 산사태가 발생하고, 때로 강풍까지 동반돼 거리에서는 나무들이 뿌리 채 뽑혀나갔다. 지인 한분은 대로를 운전 중 갑자기 나무가 자동차를 덮쳐 큰 사고를 당할 뻔했다. 폭풍우라는 외부 충격에 뿌리가 부실했던 나무들은 속수무책으로 뽑혀나갔다. 버틸 힘이 없었다.
폭우 쏟아지던 지난 19일 남가주 한인사회에서는 참담한 사건이 발생했다. 50대 중반의 남성이 그 새벽 빗속에 오렌지카운티와 LA를 오가며 총을 휘둘러 전처의 남편을 살해하고, 지인을 중태에 빠트리고, 자신의 목숨을 끊었다. 전처와는 자녀문제로, 지인과는 채무관계로 갈등과 불화가 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폭풍우에 나무뿌리 뽑히듯 극심한 감정적 재정적 스트레스에 그의 존재가 뿌리 채 뽑혀나갔다.
10년 쯤 전 LA 한인타운의 아파트 렌트비가 자꾸 오를 때였다. 아파트 소유주 협회의 한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 - "이혼하고 집 나와서 혼자 사는 남자들이 많아진 때문입니다". ‘이혼’이 아파트 수요 증가의 유일한 원인일 수는 없겠지만, 나이 들어 혼자 아파트에 세 드는 남성들이 유난히 눈에 띈다고 했다.
이후 부동산 붐과 시장 붕괴, 그로 인한 경제파탄을 거치며 근년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나이 들어 하숙하는 남성들이다. 2000년대 한국으로부터 장단기 체류자가 늘면서 한인타운에는 하숙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다. 임시 거처로 안성맞춤인 그곳에 요즘 의외로 중년 남성들이 많다고 한다. 한창 가정 이끌 나이의 남성들이 하숙을 할 때는 저마다 사연이 없지 않을 것이다. 많은 경우 가정과 경제적 능력이라는 양 날개가 꺾인 케이스들이다.
이번에 총격사건을 일으킨 50대 남성도 그런 케이스였다. 그 역시 한때는 남매를 둔 가정의 가장으로 아메리칸 드림에 부풀었었다. 하지만 손을 대는 사업마다 실패를 하면서 삶이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파산이나 실직이 경제적 어려움에서 그치지 않고 가정불화, 이혼으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불행의 패턴을 밟게 되었다.
비슷한 처지로 한인타운에서 하숙생활을 하는 한 중년남성은 이번 사건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했다.
"이혼하고 혼자 살다보면 과거에 대한 반추가 많아집니다. 어쩌다가 내가 여기까지 왔나, 어디서 잘못 된 걸까 - 끊임없이 생각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누군가를 비난하게 되고 순간적으로 감정이 격해질 수가 있습니다"
지뢰밭 같이 발 한번 잘못 디디면 그대로 폭발할 것 같은 불안정한 마음의 밭인데, 그 바탕은 고립감과 자괴감이라고 했다. 사회경제적으로 추락한 자신의 처지가 비관이 될수록 남들 앞에 나서기가 꺼려지고, 곁에 가족도 없으니 점점 외톨이가 된다는 것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 스스로 걸어 들어간 지옥문이다. 지옥은 희망이 없는 곳, 희망 없음이 사람을 속으로부터 곯게 만든다.
폭풍우가 심할 때 숲속의 나무들도 뿌리 뽑힐까? 뿌리 채 뽑히는 나무들은 대개 도로변 나무들이었던 것 같다. 홀로 서있는 나무들이다. 숲속에서 빽빽이 같이 모여 있는 나무들은 뿌리가 얽히고설켜서 웬만한 강풍에는 끄떡도 없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잡아주는 안전장치가 될 것이다.
사람의 마을에서는 가정이 숲이다. 삶에 폭풍우는 늘 있기 마련이고, 혼자 힘으로 버티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가족과의 관계가 단단하면, 그래서 존재의 뿌리들이 탄탄하게 엮여있으면 웬만한 폭풍우에는 뿌리 뽑히지 않는다. 그 단순한 진리를 너무 늦게 깨닫는 데서 많은 사람들의 불행이 시작된다.
"우리는 연습 없이 태어나 실습 없이 죽는다"고 폴란드 시인 비슬라바 쉼보르스카는 썼다. 연습 없이 태어나 사는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 우선순위를 두는 것이 지혜이다. 예수는 그것이 사랑이라고 가르쳤다. 사랑이 있어야 희망도 있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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