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동안 걸어서 지구 오지 곳곳을 여행한 한비야씨는 자신의 책에서 아프리카 여행 중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에티오피아에서 달구지를 얻어 탔다가 작은 가방을 두고 내렸는데 이 안에는 여행 중 항상 사용해야 하는 모자, 화장수, 칫솔, 정수용 알약, 휴지 등이 들어있었다. 당장 장만해야 하는 것들이었지만 워낙 오지라 언제 구입할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는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며칠 지나다 보니 없으면 너무 불편할 것이라 여겼던 물건들이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필요치 않더라는 것이다. 모자가 없었지만 면 보자기를 뒤집어쓰니 햇빛가리개로 손색이 없었으며 칫솔을 사용하는 대신 현지인들처럼 연한 나뭇가지를 깎아 이를 문지르니 더할 수 없이 개운했다.
현지인들의 술에다 레몬을 썰어 넣으니 향기 좋고 효과까지 뛰어난 화장수가 됐다. 또 손과 물만 있으면 어차피 화장지가 따로 없어도 되는 곳이 아프리카 아니던가.
한씨는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것 중에서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될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대대적인 집안정리를 했다. 그랬더니 다른 사람들보다 간소하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군더더기가 끝도 없이 나오더라는 것이다.
홀몸으로 지구촌을 누비는 한씨가 이럴진대 한곳에 정주해 가정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군더더기를 안고 살아가고 있을지는 두말할 것도 없다. 우리의 삶은 군더더기 투성이다. 집안은 온통 잡동사니들로 가득하다.
옷장을 한번 열어보라. 언제 마지막으로 입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옷들로 꽉 차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옷의 20%로 일상생활의 80%를 지낸다고 한다. 그러니 절반 이상은 쓸데없는 군더더기인 셈이다. 그런데도 차마 버리지 못해 걸어두고 있는 것이다.
옷뿐 아니라 온갖 오래된 자료들 편지, 일기장 등 손 때가 조금 묻었다 싶으면 쌓아 두는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언제 쓰일지 모른다는 막연한 미련과 소유욕, 많을수록 좋다는 생각, 한번 구입한 물건들은 절대 버려서는 안 된다는 강박관념이 작용해 집안의 물건은 쌓여만 간다. 이런 물건들 가운데는 체취와 기억이 배어 ‘자기화’ 된 것이 많다. 그걸 버리려니 자기의 일부를 지워내는 것 같아 망설이게 된다.
하지만 버리지 못하는 것도 심하면 병이다. ‘저장 강박장애’라는 이름이 붙은 질병이 다. 온갖 것들을 버리지 못하고 쌓아두는 사람들에게 사소한 물건을 버리는 상상을 하게 한 후 뇌 영상을 촬영해 보면 전두엽 부위가 지나치게 흥분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질병 수준까지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잘 버리지 못한다.
버리지 못하는 것이 어디 물건뿐인가. 나쁜 감정이나 기억 역시 그렇다. 이런 것들을 잘 버릴 수 있어야 그 자리에 건강한 감정과 온전한 판단력이 자리 잡게 된다는 것이 정신과 전문의들의 설명이다. 마치 병들거나 쓸모없는 가지를 쳐내줘야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고 실한 과일을 맺는 것과 같은 이치다.
삶에도 이런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잡동사니들은 미련 없이 버리고 부정적인 감정은 되도록 빨리 털어버리는 일이 그것이다. 잡동사니를 쌓아 두기만 하고 버릴 줄 모르는 사람들은 전반적으로 작은 일을 크게 확대해 생각하고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는 경향을 보인다.
이렇듯 불필요한 것들을 잘 버리지 못한다는 것은 쌓아둔 물건만큼이나 무거운 감정의 짐을 지고 간다는 말이 된다. 잡동사니가 에너지의 흐름을 방해한다는 풍수론이 아니더라도 쓸데없는 것들을 치워버린 공간은 일단 마음을 확 트이게 만들어 준다.
한해의 마무리가 한창이다. 올 한해 얻은 것과 잃은 것을 꼽아 보고 이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계획과 각오를 세우기도 한다. 그렇지만 새로운 것을 채우기에 앞서 먼저 해야 할 일은 버리고 비우는 것이 아닐까. 그래야 새로운 것, 더 좋은 것이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생길 테니 말이다.
채우는 것은 욕망으로 되지만 버리는 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서 채우는 일보다 버리는 일을 더 어렵다고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잘 버리고 가는 한해가 되어야겠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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