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만져지지 않는 돈은 현실감을 방해한다. 지출을 위해 지갑에서 꺼내드는 현금은 자신의 돈이 사라진다는 인식을 확실히 전달해 주지만 크레딧카드를 사용할 때는 이런 느낌이 약하다. 그래서 크레딧카드를 많이 사용하다 보면 알게 모르게 지출이 더 늘어나게 돼 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한 후 팁을 줄 때 현금으로 주는 경우보다 크레딧카드로 줄 때 액수가 13% 정도 더 늘어나는 것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어떤 물건이나 서비스를 구입할까 말까를 고심할 때도 크레딧카드 사용자가 현금 사용자 보다 더 빠른 결정을 내린다. 한결 후해진 인심과 신속한 결정은 얼마 후 고스란히 재정적 부담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국인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고 있는 경기침체의 상당부분은 막대한 액수로 불어난 개인 부채에 기인하고 있다. 경제가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 잘 나갈 것이라는 환상이 지배하던 시절 소비자들은 아낌없이 지갑을 열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소비가 에퀴티나 주가처럼 아직 현금화되지 않은 재산이 항상 거기 있으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주된 도구는 크레딧카드였다.
크레딧카드 회사들은 소비자들의 심리를 자극하면서 부문별하게 플래스틱 돈주머니를 안겨줬다. 그러나 소비생활을 영구히 지탱해 줄 것으로 믿었던 머릿속의 재산들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 빈자리에 남은 것은 크레딧카드 빚이었다.
크레딧카드 자체는 좋은 것도,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다. 잘 쓰면 약이 되고 잘못 쓰면 독이 될 뿐이다. 크레딧카드는 은행에서 돈을 빌릴 때 치러야 하는 재정적, 심리적 비용을 치르지 않고도 돈을 꺼내 사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몇 년 전 대형호텔을 잇달아 인수해 부러움을 샀던 한 젊은 한인부부는 크레딧카드 몇 개를 이용해 뽑은 현금을 종자돈으로 첫 부동산 투자를 시작했노라고 경험담을 들려주기도 했다. 또 사회생활을 하면서 현금이 없어 자칫 구겨질 수 있는 체면을 지켜주는 역할도 한다. 그러나 똑 같은 이유로 방만한 지출을 초래하고 돈에 대한 현실 감각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 크레딧카드다.
미국의 크레딧카드 사용자는 지난 1년 사이에 800만명이나 줄었다. 이들 모두가 자발적인 사용 중지자는 아니겠지만 수백만 장의 크레딧카드가 사라진 것은 차가운 현실이 뒤늦게나마 각성을 던져 준 때문으로 보인다. 미국 경제의 장기적인 건전성과 관련해 볼 때 바람직한 추세이다.
크레딧카드 사용을 억제하면서 카드당 부채액도 4,900여달러로 떨어졌다. 그러나 줄어든 카드 빚이라고 우습게 여겨서는 안 된다. 카드빚에는 금융제국을 건설한 로스차일드 백작이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고 불렀던 ‘복리이자의 힘’이 작용한다. 만약 연리 19.6%인 카드 빚 2,000달러에 대해 매달 미니멈 페이먼트만 한다면 이를 모두 갚는데 무려 22년이 걸린다.
그 사이 원금과 별도로 지불하게 되는 이자만 2,900달러에 달한다. 배보다 배꼽이 큰 형국이 다. 그러니 카드회사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기는 고객은 빚을 전액 갚을 수는 없지만 매달 미니멈 페이먼트를 하면서 파산은 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는 게 하등 이상할 것이 없다.
경기가 조금 회복 기미를 보이자 금융기관들이 다시 크레딧카드 늘리기에 나서고 있다고 13일 뉴욕타임스가 보도했다. 무분별한 지출로 곤욕을 치른 것이 바로 엊그제인데도 그때 얻은 교훈을 잊어버리고 또 다시 어리석은 선택을 하는 것이 인간이다. 카드사들의 마케팅은 이런 망각의 덫을 꿰뚫고 있다.
‘오마하의 현인’ 워런 버핏은 “크레딧카드로 인해 미국의 중산층이 소작농화 되고 있다”고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소작농은 뼈 빠지게 일해서 지주의 배만 불려 주는 불쌍한 계층이다. 힘들게 번 돈으로 카드사만 좋은 일 시킨다는 점에서 일부 크레딧카드 사용자들은 중세 소작농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한 가지 다행인 것은 소작농은 태생적으로 주어지는 운명의 굴레지만 ‘금융 소작농’들은 정신만 바짝 차리면 이런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는 점이다.
충분히 갖지 못하고 태어난 신세를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사소해 보이는 금전 누수부터 차단하는 것이 재정적인 자유를 늘려가는 지혜다. 개인 재정의 80%는 습관의 결과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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