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경기는 우리 모두에게 고통스럽지만,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그나마 약간의 위로도 있다. 와인 값이 조금씩 내려서 호주머니 부담이 얼마간 줄어든 것이다. 물론 모든 와인이 싸진 건 아니고, 가격을 내렸다기보다는 상점에서 할인된 가격에 팔고 있다는 말이 정확할 것이다.
10-50달러 대의 중저가 와인들이 좀 싸졌고, 100달러 이상의 고급 와인은 해마다 오르던 가격을 더 이상 인상하지 않고 있다. 체감으로는 20-30% 정도 내린 것 같은데 사실은 그동안 거품이 워낙 많이 끼었기 때문에 아직 더 내려가도 된다고 본다. 현재 미국에서 가장 수요가 많은 와인은 7달러 대로 전체 판매량의 72%를 차지하고 있다.
불황이 장기화되면서 와인업계가 몸살을 앓고 있다. 전세계 와인 산지는 크게 구세계(Old World)와 신세계(New World)로 구분되는데 구세계는 수백수천년 동안 와인을 만들어온 유럽(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등)을 일컫고, 신세계는 와인 역사가 일천한 유럽 외의 모든 지역(미국, 호주, 뉴질랜드, 칠레, 아르헨티나, 남아공화국 등)을 가리킨다.
지금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있는 지역은 신세계, 지난 10-20년 동안 급성장한 신흥 와인생산 지역들이다. 조상 대대로 와인을 마셔온 구세계에서는 와인이 필수품이라 생산량과 소비량에 큰 동요가 없지만, 갑자기 와인 붐이 일었던 신세계에서는 와인이 아직도 사치품이라 경기를 심하게 타고 있는 것이다.
전세계가 흥청망청하던 지난 10년동안 사람들은 건강에 좋다니까, 멋있어 보이니까, 남들이 마시니까, 맛도 잘 모르면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너도 나도 와인을 마셔댄 결과 신세계의 와인 생산량이 몇배로 증가했다.
투자자들은 와인산지를 더 많이 개발했고, 포도나무를 엄청나게 심었으며, 와이너리를 크고 멋있게 지어 상품화했다. 나파 밸리 같은 곳은 완전히 관광코스가 되버려 진지한 와인애호가들은 오히려 기피하는 곳이 됐을 정도다.
미국내 와이너리 숫자를 보면 2000년에 캘리포니아에 1,450개였던 것이 2009년에는 2,972개로 10년 만에 정확히 2배 늘었다. 미국 전체로는 2000년에 2,904개였는데 2009년 무려 6,705개로 2.3배 증가했다.(Wine Institute 통계) 이것은 미국에만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호주와 칠레, 아르헨티나도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
그렇게 팽창된 와이너리들이 요즘 부침이 심하다. 엊그제 LA타임스를 보니 내가 와인클럽 멤버로 가입해있는 파소 로블스의 유명한 와이너리 저스틴(Justin)이 피지 워터(Fiji Water) 회사에 팔렸다는 소식이다.
피지 워터는 라크마(LACMA)에 4,500만 달러를 기증하고 두달전 자기네 이름을 딴 대형 전시장 ‘린다와 스튜어트 레스닉 파빌리온’을 개관한 부부의 회사다.
저스틴 뿐 아니라 올해 캘리포니아에서는 주요 와이너리 8개의 매매가 있었는데 업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불가피한 일로 보고 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포도원 땅값이 폭락하고, 소비자들은 싼 와인만 찾는데다 호주 등지에서 오는 값싼 수입 와인들이 많아져 어중간한 와이너리들은 생존이 어려워진 것이다.
고급 와인들은 잘 팔리지가 않으니까 생산량을 줄임으로써 불황을 견디고 있다. 얼마전 굉장히 맛있는 피노 누아와 카버네 소비뇽을 아주 싸게 사서 마신 적이 있는데, 이것은 고급 와이너리에 나온 잉여 와인을 다른 곳에서 싸게 사들여 이름만 바꿔서 내놓은 것이었다.
이런 와인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선물용으론 적당치 않지만 맛을 알고 즐기는 사람들에게는 횡재나 다름없다.
이런 판국이니 캘리포니아 희귀 명품와인의 대명사인 ‘컬트 와인’은 이제 ‘죽었다’는 소리까지 나오는 실정이다.
한 병에 최하 300달러가 넘는 컬트 와인은 일반 판매되지 않고 소수의 멤버들에게만 배당되는데, 웨이팅 리스트가 하염없이 길었던 그 귀한 회원 자격을 스스로 취소하거나 매년 배당받는 양을 줄이는 사람들이 늘어나 재고가 쌓여간다고 한다.
나의 이메일에는 매일 많은 와이너리와 상점들로부터 프로모션 메일이 날아온다. 많은 와인이 세일 중이고, 옥션에 나오고, 평소에 살 수 없던 와인을 ‘특별히’ 주겠다고들 한다. 파산한 개인소장가가 헐값에 내놓은 명품 와인이 있다고 속삭이는 사람도 있다.
거품이 꺼지고 정리되는 건 좋지만 불경기가 계속되기를 바랄 수도 없는 것이 와인애호가의 딜레마다. 한미 FTA 체결로 미국 와인이 한국에서 조금 싸진다고 한다. 맛있는 캘리포니아 와인이 한국으로 많이 풀리면서 침체된 미국 와인산업이 조금이나마 회생하기를 기대한다.
정숙희 부국장·특집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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