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감사절인 25일 LA 타임스 푸드 섹션을 보니 하누카 음식이 소개되었다. 12월이면 우리는 크리스마스를 맞지만 유태인들은 ‘하누카’라는 명절을 맞는다. 우리의 음력 비슷한 유태인 달력으로 올해 하누카는 12월1일 부터 9일까지 8일간 계속된다.
하누카는 기원전 165년 경 예루살렘 성전 탈환을 기념하는 명절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헬레니즘 문화권인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 4세의 통치를 받았는데, 종교적 박해가 극심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우스신에 대한 제사가 드려지고, 유태교를 고집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처형되었다.
이때 레위 지파의 마카비가 주축이 돼 저항세력이 규합되고, 이들 마카비 유격대가 예루살렘을 수복한다. 마카비가 이교도의 제사로 더럽혀진 성전을 되찾아 정결하게 하고 봉헌한 것을 기념하는 명절이 하누카다. 유태인들에게는 매우 즐거운 명절이다.
하누카 음식에 관한 기사를 읽어보니 음식마다 의미가 담겨있었다. 성전 촛대의 불을 밝힌 올리브 오일, 즉 감람유를 기억하며 튀긴 음식을 먹고, 마카비 유격대가 은거하던 야산 초목을 기억하느라 샐러드를 먹으며, 한 아름다운 여성이 치즈로 적장을 유혹해 술을 먹인 후 목을 벤 사건을 기리며 치즈 요리를 먹는다.
의미 부여가 너무 유난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수천 년 전의 사건들을 자손 대대로 전하며 의미를 되새겨온 전통이 바로 유태인들의 힘이었다.
유태인들에게는 절기가 유난히 많다. 대개 9월에 시작되는 새해맞이 로시 하샤나, 곧 이어 속죄의 절기인 욤 키퍼, 그리고 나면 거의 매달 중요한 절기가 이어진다. 그 절기마다 정해진 의식을 행하면서 자손대대로 종교적 문화적 전통을 고수한 것이 2000년 디아스포라를 버텨낸 힘이 되었다.
나라 없이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던 유태인들을 하나로 묶어준 수평적 연대감, 그리고 그 민족을 자자손손 묶어준 수직적 연대감의 핵심은 전통이다. 전통으로 각인된 정체성이다.
추수감사절을 시작으로 자녀들이 집으로 돌아오는 계절이다. 먼 바다에 나가있던 연어 떼가 모천으로 돌아오듯 학교 따라, 직장 따라 흩어져 사는 자녀들이 연말이면 부모를 찾아온다. 그들을 돌아오게 만드는 것은 가족으로서의 정체성, 지구 반 바퀴 떨어져 있어도 여전히 끈끈한 가족 간의 연대감이다.
세계화 시대인 지금은 가족 디아스포라 시대다. 자녀들이 어른이 되어서도 한 지역에 모여 사는 부모는 복이 많다. 대개는 동부, 서부 혹은 해외로 뿔뿔이 흩어져서 1년에 한두번 얼굴 보기가 힘들다. 자녀가 대학에 가느라 집을 떠날 때까지만 해도 부모들이 예상하지 못하던 상황이다.
유태인들이 소수민족으로서의 박해를 피하느라 옮겨다니다보니 디아스포라의 민족이 되었다면, 지금은 자녀가 더 나은 학교, 더 나은 직장을 찾도록 후원하다 보면 어느새 디아스포라의 가족이 된다.
가족의 전통이 필요하다. 가족이 한 지붕 밑에 모여 사는 것은 대개 자녀가 대학 가기 전까지 17~18년. 그때까지 가족 간에 얼마나 돈독한 관계가 만들어졌느냐가 성년 자녀와 부모의 관계를 결정한다. 가족으로서 함께 한 시간과 경험, 특히 정기적으로 반복되어서 가족의 전통이 된 경험들이 유대감의 뼈대가 된다.
남가주에서 자라 뉴욕에서 치과의사로 일하는 청년이 있다. 수년 전 한 동네에서 살면서 우리 아이들과 친구였는데, 그는 중국 음식점에만 가면 남가주의 집 생각이 난다고 했다. 중고교 시절, 매주 일요일이면 노인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를 모시고 중국집에 가는 것이 그 가족의 ‘주말 행사’, 즉 전통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는 어떤 전통이 있는가’ 생각해보자. 아직 없다면 하나쯤 만들 필요가 있다. 쉽게 지킬 수 있는 것일수록 좋겠다. 매주 토요일 식당에 가서 브런치 하기, 주말마다 손잡고 도서관에 가기, 매년 같은 때 가족휴가 가기 … 오랜 세월 반복되는 동안 그 경험들은 정신의 탯줄이 되어 가족을 하나로 묶어 줄 것이다.
시간은 매순간 흩어지고 사라진다. 의식에 각인되는 시간만이 기억으로 남는다. 전통은 시간에 의미를 부여해서 의식에 뿌리 내리게 한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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