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에는 유난히 부음이 많았다. 나이 들수록 알고 지내는 분들의 연세도 같이 높아지는 탓인지, 친척 친지 여러 분이 연이어 돌아가셨다.
장례식장에 가면 고인을 느끼게 하는 분위기가 있다. 그분이 이생에서 살았던 삶이 어떠했는지, 유가족을 통해, 조문객을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분의 장례식이 왠지 형식적이고 썰렁한 경우가 있고, 평범한 소시민으로 살았던 분의 장례식에 애도하는 사람들이 밀려 풍성한 슬픔의 축제가 되는 경우가 있다. ‘이생’이라는 들판에서 무엇을 심고 무엇을 추수했는지, 수확의 내용이 만들어내는 차이이다.
오하이오의 작은 도시 캔톤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내려 온다. 주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이던 대공황 당시 어느 마음씨 좋은 신사가 돈을 나누어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캔톤 토박이들 사이에 풍문처럼 남아 있는 이 이야기는 실제 사건이었다.
1933년 12월18일자 지역신문에는 이런 기사가 실렸다. 불우한 이웃 75명에게 10달러씩 나눠주려는 남성이 있으니 그에게 편지를 보내라는 내용이었다. 얼마나 형편이 어려운지, 돈을 받으면 어디에 쓸 것인지를 써 보내면 ‘B. 버도트’라는 가명의 그 남성은 비밀을 보장한 채 수표를 보내주겠다고 했다.
당시 캔톤의 실업률은 50%였다. 아이들은 영양실조에 걸리고 한겨울에도 난방을 못하는 집이 부지기수였다. 우유 한 통에 7센트, 계란 12개 한줄에 30센트 하던 시절 10달러는 상당히 도움이 되는 액수였다. 도움을 청하는 편지가 쇄도했고, 수표가 보내졌고, 비밀은 지켜졌다. ‘버도트’가 누구인지, 도움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 세월 속에 묻혔다.
그리고 75년이 흐른 지난 2008년 8월, ‘버도트의 비밀’은 우연한 기회에 밝혀졌다. 그해 여름 클리블랜드,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의 테드 거프 교수는 어머니로부터 낡은 가죽가방을 건네받았다. 여든 살 노모의 집 다락방에 수십년 쳐박혀 있던 가방이었다. 가방을 열어보니 글씨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오래된 편지 뭉치들이 들어 있었다. 모두 ‘B. 버도트 씨’ 앞으로 보내진 편지였다.
그때서야 그는 전설 속의 ‘버도트’가 자신의 외할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당시 어려운 사람이 너무 많아서 75명 대신 150명에게 5달러씩 나눠줬다는 사실도 가방 속의 돌아온 수표들로 알게 되었다.
’추수’에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첫 번째는 농부가 씨를 뿌리고 농사지어 결실을 거두는 1차원적 추수다. 우리 모두 저마다의 분야에서 농사를 지어 노력한 만큼의 성과를 얻는다. 성공할수록 주머니가 두둑해지는 물질적 추수, 현실의 곳간을 채우는 추수다.
두 번째 추수는 ‘하늘의 곳간’을 채우는 추수. 두둑해진 내 주머니를 덜어낼수록 풍성해지는 추수, 이웃에게 나눔으로써 그 마음속에 감사의 씨앗 하나씩 심어가는 마음의 농사다.
거프 교수는 외할아버지의 선행이 사람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알고 싶었다. 의류 사업가였던 할아버지가 이웃에게 베풂으로써 거둔 추수의 내용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당시 편지로 도움을 청했던 사람들을 추적해 그 후손들 500여명을 만나고 인터뷰했다.
그때 도움이 없었다면 혹독한 대공황의 칼바람을 이겨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는 고백들이 많았다. 엄동설한 같은 현실 속에서 예상치 못했던 온정의 손길이 일용할 양식을 보탰을 뿐 아니라 현실을 버티고 일어설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고 했다. 거프 교수는 할아버지의 아름다운 추수의 내용을 엮어 최근 ‘비밀의 선물’이란 책을 펴냈다.
한국에서 2년 전 KAIST에 전 재산 578억원을 기부해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 있다. 대한민국 한의학 박사 1호인 류근철 박사다. 그가 지난 달 KBS의 한 건강 프로그램에 출연했는데 8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건강한 모습이었다. 방송 중 그가 이런 말을 했다 - "광이 그득하면 도둑 걱정, 쥐 걱정으로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광이 비면 마음이 편하다". 그러니 몸도 마음도 건강해진다는 말이었다.
추수감사절이 다가온다. 이생의 들판에서 우리는 어떤 추수를 하고 있는가. 여전히 광을 채우는 1차원적 추수만 하고 있다면 추수의 차원을 높여보자. 광을 비우는, 그래서 마음을 얻는 추수가 아름답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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