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는 미국의 서민들에게 ‘잃어버린 10년’이었다. 한 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았음에도 실질소득은 전혀 증가하지 않았고 주택시장이 붕괴되면서 주택 소유율은 2000년 이전 수준으로 떨어졌다. 주가 역시 1999년 수준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있으니 서민들에게 경제적으로는 아무런 진전이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경제학자들은 지난 10년을 제 자리 걸음을 했다는 뜻에서 ‘빅 제로’의 시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빅 제로는 서민층의 실상일 뿐이다. 가진 사람들에게는 다른 나라 얘기다. 최악의 경기침체가 지속되던 시기에 부자들은 오히려 더 부자가 됐다. 연간 5,000만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 미국의 수퍼 부자 숫자가 2008년부터 2009년 1년 사이에 무려 5배나 늘었다. 최악의 경제상황 속에서 서민들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 치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30여년 전만 해도 미국은 이렇지 않았다. 인간사회라면 절대로 비껴갈 수 없는 냉엄한 현실이 불평등이기는 하지만 1970년대까지 미국사회의 소득격차는 그래도 합리적인 수준이었다. 1976년 미국의 상위 1% 계층이 전체 소득 가운데 차지한 비중은 8.9%였다. 이것이 31년 후인 2007년에는 무려 23.5%로 치솟았다.
보수 이론가들은 부자들의 돈이 낙수처럼 밑으로 흘러내려 온다며 ‘트리클 다운’ 이론을 들먹이지만 지난 수십년 간 미국 경제의 실상은 ‘트리클 업’이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트리클 업’ 은 성장의 실과를 부자들이 대부분 가져가는 ‘승자독식’의 경제이다.
계층 간 소득 불균형에 대해 학자와 전문가들이 가장 많이 꺼내드는 분석 도구는 교육과 기술이다. 교육과 기술의 격차가 소득의 차이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분석은 같은 교육을 받은 사람들 간의 엄청난 소득 차이와, 왜 미국의 소득격차가 다른 선진국들보다 극심한지 설명해 주지 못한다. 한 경제전문가는 “미국은 선진국들 가운데 소득 불평등 부문에서 단연 금메달 감”이라고 꼬집고 있다. 부끄러운 금메달이다.
이런 불평등이 교육이나 경제 그 자체가 아니라 정치에 의해 심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최근 공감대를 넓혀가고 있다. 주로 소장 정치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는 이 주장에 따르면 미국 정치가 금권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부터 정치권에서 나오는 굵직한 정책결정이 부자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는 것이다.
이런 불합리한 현상은 1970년대부터 시작된 TV 정치시대와 맞물려 있다. TV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정치인들에게 자금은 매체광고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실탄이 됐고 큰돈을 댈 수 있는 부자들의 영향력이 자연히 커지게 됐다. 전통적으로 부자 정당인 공화당은 말할 것도 없고 민주당 역시 금권의 영향에서 자유롭지 않다. 돈으로 유권자 마음은 살 수 없을지 몰라도 정치인들의 마음은 확실히 살 수 있다.
레이건 행정부 이래 쏟아져 나온 부자 감세와 각종 규제 완화, 그리고 노조 약화 등 친 기업 정책들에 힘입어 부자들은 더욱 빠른 속도로 부를 증식시켜 올 수 있었다. 공화당이 승리를 거둔 중간선거가 끝난 후 미국신문에 실린 한 만평이 눈길을 끈다. 어떤 사람이 “최대 승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옆에서 신문을 보고 있던 사람이 “돈을 가장 많이 지른 사람들”이라고 대답한다. 신문에는 공화당에 정치 자금을 후원한 익명의 기업 기부자들이 트로피를 들고 환호하는 모습이 실려 있다. 이 만평은 작금의 미국 현실을 냉소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승리한 공화당은 민주당이 추진하던 규제를 백지화 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민주당의 패배와 공화당의 승리로 지난 2년 동안 격차의 심화를 늦춰주던 작은 브레이크마저 사라지게 됐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 노동부 장관을 지낸 경제전문가 로버트 라이시는 오바마에게 “2년 후 승리를 원한다면 공화당의 프레임에 휘말리지 말고 민주당은 서민들의 편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는 전략을 취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제도는 아닐지 몰라도 이것이 가지고 있는 큰 장점은 다수가 관련된 문제를 해결하는데 그나마 가장 효율적인 제도라는 점이다. 그런데 금권의 영향력이 비대해지면서 미국의 민주주의는 점차 그런 기능을 잃어가고 있다. 지금 미국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경제위기가 아니다. 본질적으로는 정치의 위기다. 그래서 되돌려 놓기가 쉽지 않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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