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한국에서 여기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수유리의 크리스천 아카데미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여성이 국회의원 후보로 나온다면 우리는 지지해야 하는가"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었다.
반대하는 측은 언론의 불편부당 원칙을 내세웠다. 여기자들이라고 해서 여성후보를 지지하는 것은 형평성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찬성하는 측은 사회정의를 내세웠다. 남녀차별이 심각한 상황에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돕는 것이 정의라는 주장이었다. 후보가 같은 여성이어서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약자이기 때문에 도와서 남녀가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해묵은 이슈가 선거바람을 타고 미국에서 다시 떠올랐다. 여성의 정치력 신장과 권익향상을 위해 여성은 여성후보를 지지해야 하는가 - 2주 후로 다가온 2010년 선거에서 미국의 여성들, 특히 여권운동 진영에 던져진 질문이다. 이번 선거는 전통적 여권운동 진영이 보기에 대단히 이상한 선거이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애매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010년 선거에서 가장 요란한 현상은 티파티 운동이다. 엄청난 자금 동원력과 지지 후보에 대한 전폭적 지원으로 전국을 휩쓸며 뉴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다음 눈길을 끄는 것은 공화당의 여성후보 군단. 미국 역사상 연방 상하원 선거에 올해처럼 많은 여성들이 후보로 나선 적이 없다. 상원 15석, 하원 138석에 도전 중이다. 특히 공화당 후보(상원 6석, 하원 47석)로 여성이 이렇게 많은 것은 얼마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정계는 미국에서 여성의 진출이 가장 더딘 분야에 속한다. 연방의회에서 여성의원의 비율은 16%에 불과하다. 상원 100석 중 17석, 하원 435석 중 73석을 여성이 차지할 뿐이다. 그나마 대부분은 민주당이고 공화당은 1/4 정도이다. 공화당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에 부정적이었다.
예를 들어 2008년 퓨 여론조사에서 학령기 아동의 엄마를 후보로 내세우는 데 찬성한다는 의견은 1/5에 불과했다. “아이나 키우지 정치는 무슨 …" “남성이라야 표가 모이지. 여성은 안 돼" 하는 정서가 강했다.
이런 뿌리 깊은 고정관념을 몰아낸 일등공신이 바로 새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였다. 2008년 대선에서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뽑힐 때만 해도 무명 인사였던 그는 이제까지 누구도 하지 못한 일을 해냈다. 공화당 내에 여성바람을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공화당 여성후보들 중 상당수는 티파티의 지원과 새라 페일린의 후광에 의지해 캠페인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정치적 입장이 극단적으로 보수적인만큼 논란이 그치지 않는다.
우선 그들은 대부분 여성의 낙태권리를 반대한다. 전통적 여권옹호 입장에서 보면 실망스런 일이다. 특히 논란이 많은 델라웨어의 연방상원 후보 크리스틴 오도넬은 여성이 육사 등 군사학교에 가면 국방에 문제가 생긴다며 반대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수십년 싸워서 얻어낸 성과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입장이다.
여권운동 진영은 당혹해 하고 있다. 늘 뒷전에 물러나 있던 보수성향의 공화당 여성들이 대거 정치 전면에 나섰다는 점은 분명 환영할만한 일이다. ‘여성 정치인’ 하면 진보적 민주당으로 굳어진 이미지를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이들 여성 후보의 ‘성향’이 문제이다. 여권운동 진영과는 정반대 입장에 서서 페일린과 그를 추종하는 공화당 여성후보들은 자칭 ‘페미니스트’이다.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여성의 권익을 추구한다는 주장이다. 이들을 페미니스트로 껴안을 수도 없고 이들을 떼어내고 ‘우리’만의 페미니즘을 이어갈 수도 없는 것이 여권운동 진영의 고민이다.
성별을 ‘페미니스트’의 조건으로 삼던 시대는 지난 것 같다. 세상이 많이 바뀌었다. 여성이건 남성이건 여성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할 것이다. 페미니즘도 시험대에 올랐다. 대상을 여성으로만 국한해서는 이제 한계가 있다. 성별, 인종, 계층에 따른 모든 차별을 없애는 범사회적 운동으로 변해야 할 때가 되었다.
junghkwon@koreatimes.com
권정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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