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의 끝이 보이지 않던 1945년 일본의 이오지마 섬. 종군기자 로젠탈은 섬 상륙을 마친 미군들이 섬 최정상인 수리바치 산에 성조기를 꽂는 사진 한 장을 찍었다. 로젠탈의 이 사진 한 장은 전쟁의 끝이 보인다는 희망을 미국인들에게 전해준 상징물이었다. 연출된 사진 속의 병사들은 일약 미국인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메가폰을 잡아 2007년 초 개봉한 영화 ‘아버지의 깃발’은 이 사진의 진실을 파헤친 작업이다. 사진 속 주인공이라는 이유만으로 영문도 모른 채 영웅이 된 세 병사는 “우리는 단지 한 장의 사진에 찍힌 것일 뿐이며 진정한 영웅은 목숨을 잃은 전우들”이라며 이런 대접에 곤혹스러워 한다.
하지만 국가는 이 어린 병사들을 전쟁채권 파는 일에 최대한 이용한다. 영화에서는 “영웅은 만들어 지는 것”이라는 대사가 나온다. 이스트우드의 영화는 만들어진 영웅들의 삶이 어떻게 피폐화 되어 가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대중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항상 무언가 열광할 대상을 갈구한다. 국가와 매스컴은 이런 대중의 욕구를 교묘하게 이용해 자신의 목적에 부합하는 영웅을 찾아내고 만들어 낸다.
진정한 영웅이든 만들어진 영웅이든 이들이 걸어가야 하는 길은 쉬운 행로가 아니다. 세상의 뜨거운 관심이 쏟아지면서 이전의 삶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사람들이 그들을 그냥 놔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열광은 마약과 같아 한번 취하기 시작하면 쉬 깨어나지 못한다.
문제는 대중의 변덕이다. 대중은 어린아이와 같다. 어제까지 물고 빨고 하던 장난감도 싫증이 난다 싶으면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눈길 한번 주지 않는다. 영웅들도 이렇게 소모되고 버려진다. 이미 관심과 열광에 중독된 영웅들에게 이런 외면은 견딜 수 없는 일이 된다. 그래서 많은 영웅들이 술과 마약에 찌드는 등 비참한 말로를 걷는다.
역경 속 리더십의 전범으로 꼽히는 어네스트 셰클턴은 1914년 수십 명의 대원을 이끌고 남극횡단에 나섰다가 배가 얼음에 갇히는 바람에 수년 동안 극한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투쟁을 벌여야 했다. 셰클턴의 경험담은 모든 드라마적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불행인지 아니면 다행인지 셰클턴의 이야기는 매스컴의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당시 국가와 매스컴이 필요로 했던 것은 실패한 탐험가가 아니라 전쟁영웅이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셰클턴의 투쟁기는 대중에 의해 소모되지 않음으로써 한층 더 길고 강한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다.
지하 662미터에서 극적으로 생환한 33명의 칠레 광부들이 일약 전 세계인들의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다. 절망적 상황에서 인간 의지의 위대함을 보여준 이들은 영웅의 칭호를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69일 만에 지상의 빛으로 걸어 나온 광부들에게는 갱도로 내려가기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이 기다리고 있다.
온갖 성금과 보상금은 물론이고 이들의 스토리를 책과 영화로 만들겠다는 제의도 잇따르고 있다.
광부들은 지하 갱도에 갇혀 있는 동안 일어난 이야기를 개별적으로 발설하지 않겠다는 침묵의 서약과 함께 모든 수익을 똑 같이 분배하기로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 서약은 머지않아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명예와 부를 똑같이 나눈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상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33명이나 될 때는 더욱 그렇다. 벌써부터 “우리 약속은 구속력이 없다”며 침묵을 깨는 광부가 나오는 것이 이를 보여준다.
조금씩 터져 나오는 광부들 사이의 이견이나 분쟁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지금의 뜨거운 관심과 찬사가 썰물처럼 빠져 나간 후의 그들의 삶이다. 이들 역시 상업적, 정치적으로 한껏 소비된 후 잊혀 질 것이다. 영웅들이 망가지게 되면 본래의 영웅담이 지니고 있는 가치 또한 훼손 될 수밖에 없다.
칠레광부들의 사투와 생환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뛰게 하는 희망의 메시지로 오래 기억되게 하려면 이들이 하루 속히 이전의 평범한 삶으로 돌아갈 수 있게 모두가 도와줘야 한다. 그런데도 이런 외침이 그 누구의 귀에도 들리지 않는 것 같으니 안타깝다.
yoonscho@koreatimes.com
조윤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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